성령강림절 주일말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로서의 성령강림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교회에는 교회력이 있어서, 지난주에 우리는 승천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승천이 가진 의미와 그 실제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성령강림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긴 절기입니다. 앞으로 무려 스물일곱 주간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 대림절을 거쳐 성탄절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부활 후 여덟 주, 승천 후 두 주, 그리고 오늘 성령강림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부활절, 고난주간, 성령강림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절기들을 그저 한 주간의 이벤트로만 여기고, 그 주가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안에교회는 그렇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금년에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 후 일곱째 주까지 그 의미와 깊이를 계속 묵상했고, 승천주일도 단지 한 주로 끝내지 않고 열흘에 걸쳐 두 주간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성령강림절의 첫 주를 시작하여, 앞으로 스물일곱 주에 걸쳐 성령강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해마다 1년 주기로 이 절기들을 돌고 또 돕니다. 그러니 2026년 성령강림 후 스물일곱 주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내년에는 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시리즈로 계속 이어가며 함께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저는 평상시에 내안에교회 영상의 일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상 작업은 쉬운 부분도 있지만 어려운 부분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만드는 것은 대부분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가져와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작해야 하는 일이라 머릿속이 다 막혀버리는 순간이 필연적으로 찾아옵니다. 그때 아 힘들다, 힘들다 하는 시간이 옵니다.
예전 같으면 그 순간에 저는 제 말로 표현하자면 딴짓을 했습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쇼츠를 보거나 다른 무언가로 도피했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모습이 있습니다. 그 막막한 순간에 가만히 앉아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합니다. 쇼츠도 보지 않고 다른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커피 한 잔 들고 천천히 걸으면서 예수는 그리스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제 머리가 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쉰다고 하면서 쇼츠를 보거나 다른 영상을 보면, 도리어 정보량이 더 차서 다시 집중하려 할 때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스타일을 알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예수는 그리스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정리되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제는 오히려 집중력이 더 깊어지고 더 길어졌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아동들을 돌볼 시간도 있었습니다. 낮에 더우니까 내안에교회 영상을 크게 틀어 놓습니다. 아이들이 듣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 순간 똥이 나올 때도 예수는 그리스도, 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그 나이에는 똥이라는 단어를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예수는 그리스도가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이번에는 새로 더해진 장면이 있습니다. 돼지꿈을 꿀 때도 예수는 그리스도라며 친구가 한 명 더 늘었습니다. 서로 마주 보고 그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안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듣고 있구나,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그래서 계속 그 영상을 틀어주고, 정시 기도를 계속 재생해 놓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에도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독일에 축구로 보낸 선교사가 있는데, 어제 포칼컵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독일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큰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경기 중에 제 옛 습성이 그대로 튀어나왔습니다. 잘 풀리지 않으니까 왜 저렇게 하느냐며 소리를 지르는 제 모습을 봤습니다. 예전 같으면 훨씬 더 크게 소리쳤을 것이고, 작은 욕도 튀어나왔습니다. 그때 옆에 계신 분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때도 예수는 그리스도 해야지요. 그 말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무엇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속에서 무너지려는 마음이 들 때, 그 자리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저 마음 바꾸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저의 옛 모습을 보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명히 달라진 저를 보았습니다.
드러나는 모든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더 깊이 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자신을 정죄해 봐야 거기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정죄하던 그 마음 그대로 다른 사람도 정죄하게 됩니다.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축구 경기를 볼 때, 또 지금 같은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나올 때, 사람들은 분노를 마구 쏟아냅니다. 그렇게 분노로 쏘아붙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속에 있는 것이 자꾸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그때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합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힘을 얻도록, 정치인들이 달라지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부터 달라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이번 주에도 저는 창세기 3장 1절에서 5절을 묵상했습니다. 아, 인간이 타락했구나. 그런데 그 전에, 에덴동산에 이미 와 있는 존재가 있구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대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쫓겨난 자입니다. 그러니 그 존재가 인간을 볼 때 얼마나 하찮게 보였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을 만드시며 에덴동산을 잘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분명히 선악과를 먹게 하여 너를 유혹하는 존재가 있다고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을 이길 수 없는 존재였기에, 결국 그 자리에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입니다. 본래 인간 바깥에 있던 것들, 곧 죽음과 죄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 그리고 결국 영혼까지 멸망에 이르게 되는 그 모든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바깥에 있던 것이 안에 들어와 그 안에서 계속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교묘한지, 저는 이번 주에 또렷이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생각으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다 이 생각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 가운데서 저는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그 해결책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성경은 절망과 죽음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해결책을 주셨다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맺어야 하는 결론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여자의 후손이 온다고 선언되었습니다. 사단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 사단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뼈저리게 느낀 일이 있습니다. 저는 한 주에 두세 번 정도 아산병원에 갑니다. 가서 기도하고 현장을 둘러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병원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겠습니까. 의사들, 간호사들, 평소에는 만날 수도 없는 분들이 그곳에는 다 있습니다. 차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보호자들도 환자들도 끝없이 오갑니다. 그 가운데서 저는 늘 묻습니다. 저분들의 마음은 어떨까. 어떻게 저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현장은 제게 매일의 연구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갑작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전화가 왔는데, 제가 잘 아는 분이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응급실로 갔습니다. 그분은 꼼짝없이 누워 계셨고, 엑스레이를 찍고 응급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필 어제는 쉬는 날이라 사람도 적고, 의사도 당직 몇 명뿐이었습니다. 저는 응급실의 보호자로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 있는데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밀려왔습니다. 응급실을 가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옆 침상에서 들리는 심박 측정기 소리, 그 박동 하나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흔듭니다. 저에게도 그 순간 죽음이 훅 밀려왔습니다. 저 옆에 있는 분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쫙 밀려왔습니다.
저는 거기서 세 시간을 있었습니다. 그 시간은 진짜 사람을 죽이는 고문 같았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어차피 시간이 필요한데, 사람은 그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자기 안에서 모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객관적인 사실이 나오기도 전에 죽음의 공포로 자기를 먼저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그분이 돌아가시고, 저는 혼자 남아 살고 있는 모습까지 펼쳐졌습니다.
예전에 머리로 알고 있던 것과, 직접 당사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 겪는 것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숨이 막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무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전과 지금이 달랐던 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죽음의 영, 죽음의 생각이 꽉 차서 숨도 못 쉴 것 같은 상황에서, 보통은 탈출구를 찾습니다. 옛날에는 스마트폰이 없었으니 두리번거리기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라는 탈출구가 손 안에 있습니다. 검색을 해 보거나, 머리를 식히려고 쇼츠를 보거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깥에 나가서는 거의 스마트폰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딱 닫아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 그 고백을 계속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훈련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음의 공포가 더는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간이 되면 사람은 꼭 누군가에게 전화를 합니다. 야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어집니다. 저도 정말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참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제가 응답해야 할 자리이고, 제가 풀어야 할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던져서 그분을 또 다른 공포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고, 그 자리에 둘이 그냥 앉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며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평소에 예수는 그리스도를 깊이 누리고 있기에 이런 순간도 견딜 수 있었고, 극복할 수 있었고, 내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신앙적인 생각을 이겨 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에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깊이를 한층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맥락을 볼 때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 어느 구절을 보든지 마음속에 이미 맺어져 있어야 할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세 번째. 성경 전체의 맥락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까지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만 따로 떼어 해석하려고 하면 결국 근시안적인 해석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이 본문을 봐야 합니다.
성경의 가장 밑바닥에는 늘 창세기 3장 15절이 깔려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온다. 그 후손이 와야만 인간의 모든 문제,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된다는 선언입니다. 이 구조가 성경 전체의 바탕입니다.
구약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로부터 시작해 그 후손이 온다는 약속을 끝까지 이어 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복음서에 이르러 그분이 오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그분이 오셨고,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예수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 안에서 맺어져야 하는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그 모든 행하심이 그리스도라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의 성취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만약 거기서 죽음으로 끝났다면, 그저 좋은 일 하셨던 한 분이 가신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로써 우리 인간의 죽음 문제가 그분 안에서 해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십 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승천 전에 예수님께서 늘 말씀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간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시고, 나는 늘 아버지를 보아 왔다. 그러므로 내가 그분께로부터 왔다. 그 말씀이 그 당시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 승천의 사건을 통해, 그 말씀이 사실이었음이 인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에 이르렀습니다. 가장 논란이 많은 본문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성령이 드디어 오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을 쓰면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백이십 명에게 갑자기 불 같은 성령이 임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기록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셨고, 이전에 약속하신 그대로,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성령을 보내겠다, 그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실 것이며 나를 증거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약속이 진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은 단순히 갑자기 성령이 오셨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성령을 보내셨다. 곧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동시에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살아 계시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이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다는 사실이 먼저 전제로 깔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전제 위에서 성령이 오셨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네 번째.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오늘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오늘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먼저 이론적으로 정립할 부분이 있습니다. 기준을 분명히 잡아 놓고, 그 위에서 차차 성령의 능력과 권능을 함께 체험해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우선 개념적으로 세 가지를 중점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결론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
우리는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결론을 늘 성령이 강림했다는 사실 자체에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결론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증거로서 성령이 오셨다는 데에 있어야 합니다. 그 시각에서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을 보고 야, 이거 대단하다, 우리도 저런 권능을 받아야겠다, 그쪽으로만 빠지면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살아 계시며, 그분이 친히 요청하시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복음의 주권자로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그 증거가 오늘 성령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이 결론을 분명히 맺어야 합니다.
둘째, 본문을 볼 때 가장 오해되는 지점
이것은 제 개인적인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구약성경보다 신약성경을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본 성경책 자체가 구약까지 다 들어 있는 두꺼운 성경이 아니라, 신약만 있는 얇은 성경책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구약까지 포함된 성경책은 값이 비싸서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 목사로 사역할 때에도 기독교 단체에서 군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는 성경은 대부분 신약 성경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한 것이 신약부터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으로 시작해서 사도행전이 나오니, 예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시고, 곧이어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식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성경이 예수님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빠지는 가장 큰 난센스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구약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구약 위에 신약이 있고, 창세기 3장 15절 위에 신약이 있으며, 신약도 복음서를 기본으로 그 다음에 사도행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본문을 볼 때, 그것을 동떨어진 한 토막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구약과 복음서를 기초로 한 위에서 사도행전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무엇입니까. 역사서입니다. 능력이 행해진 기록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복음서의 후속편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후속편으로서의 사도행전입니다. 이 배경 위에서 사도행전을 읽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나라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
이제 조금 더 실제적인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전, 신학대학에 다닐 때, 더 거슬러 올라가서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 온 것이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 능력을 행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 그것이 제 어린 시절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새벽 예배에 가면 목사님들이, 권사님들이 방언으로 크게 기도하셨습니다. 그 시대에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여겨지던 모델은, 방언으로 크게 기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소속되어 있던 고향 교회만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여의도순복음교회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방언 기도가 어느 한 교회의 스타일이 아니라,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한국 교회 전체의 흐름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미 수십만 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 시대 대한민국에는 수십만 명이 모이는 교회 자체가 없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따져도 한 교회 교인이 칠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순복음교회라고 하면 예전만큼의 상징성은 줄었을지 모르지만, 제가 중고등학교나 신학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줄이었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신앙생활에서 방언 기도라고 하면 늘 그곳이 연상되었고, 그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문이 바로 오늘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이었습니다. 바람이 등장하고, 불이 등장하고, 사람들이 불의 혀같이 갈라져 임하는 그 장면이 신앙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오면서 대한민국 교회 안에서 성령이라고 하면 곧 방언, 불, 신비, 그것이 늘 깔려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성령은 성경 전체와 동떨어진 자리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복음서나 구약은 다 필요 없고, 오직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만 가지고, 거기에서 성령만 끌어다 모든 것을 풀어내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도 다 빠지고, 성령 중심으로만 성경을 보고, 성령으로만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 흐름에 저 또한 깊이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 시절 그런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고 사람들을 가르쳐야 했고, 그 시대 대한민국 교회의 큰 흐름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처럼 성경을 중시하던 흐름조차, 어떤 부분에서 뜨겁게 무엇인가가 일어나야만 신앙답다고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든, 통역을 하든, 능력을 행하든,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답, 곧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과 그 성취로서의 그리스도라는 기본 위에서 따라올 때에만 비로소 바른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본은 빠진 채 성령만 앞세우면, 그것은 곧 신비주의로 흘러갑니다. 그 밑바탕을 추적해 보면 무엇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무속적인 뿌리가 드러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옛날부터 내려온 무당적인 성향이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인가 봉사하고, 돈을 갖다 바치고, 그러면 무당이 신비로운 한마디를 던집니다. 그것이 대단한 말로 들리고, 알 수 없는 방언 같은 말이 신성하게 여겨집니다. 그 패턴이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주의의 외형이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다만 그 위에 포장된 것이 있을 뿐입니다. 방언으로, 예언으로, 병 고침으로, 무엇인가 뛰는 모습으로 포장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진짜로 해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해결된 것 같았을 뿐,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결국 어디로 갔습니까. 많은 분들이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신비주의의 자리로 갔습니다. 지금도 예전 모습 그대로 신앙생활을 이어 가고 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도리어 옛 무당적 신앙으로 되돌아간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한 흐름이 만들어 낸 실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준비하며 제가 다다른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기본이 서지 않은 채,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만 떼어 신비주의로 가고, 방언과 능력만을 좇으면, 결국 산으로 갑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강림절이 성립되려면 그 앞에 분명한 전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셔야만 가능했고, 그 전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야 했고, 그 전에 부활하셔야 했고, 그 전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약 성경 전체가 그 길을 준비해 왔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승천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 모든 전제가 채워질 때, 비로소 성령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결국 나 자신 아니겠습니까. 성령이 임재하셨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삶 한가운데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첫째, 요한복음 1장 12절.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그분의 이름을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이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손에 계시다는 사실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물을 때, 그 답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나는 그 이름을 부르기에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 권세를 받은 자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왜 그러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기에, 바로 그것이 근거가 됩니다.
둘째, 요한복음 19장 30절. 다 이루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이미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이 지금도 여러분과 저에게 그대로 성취된다는 뜻입니다.
어제 축구 보면서 저도 모르게 말이 험하게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 다음에 속에서 정죄의 소리가 끊임없이 올라옵니다.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그러면 또 자신을 정죄하고, 그 자리에서 곧장 우울해지고 비참해집니다. 한순간에 나는 다시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 순간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압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십 초 전에 일어난 일도, 오 초 전에 일어난 일도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은 다시 역사하십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이 지금도 나에게 그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이번 주에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셋째, 성령께서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사실은 결국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처럼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그 자리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오늘 우리 안에까지 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은 너희에게 성령이 오시면 너희 가운데 계셔서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여러분과 저 안에 계십니다.
넷째, 요한일서 3장 8절. 지금 우리가 해체해야 할 일
요한일서 3장 8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속에는 수많은 불신앙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해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꺾을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이 승천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번 한 주간도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수많은 혜택과 권리와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여러분과 저의 삶 한복판에서 구체적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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