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말씀
믿는 자의 육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저번 주에 이어, 오늘은 그 성령이 단지 외부에서 임한 사건이 아니라 믿는 자의 육체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영이라는 사실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내안에교회는 늘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수많은 부정적 생각, 습관적 생각, 불신앙적 생각이 쌓이고 또 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밀어내고 몰아내며,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기 위해 자신에게 끊임없이 고백합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성경의 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을 마음속에 계속 심어 놓아야만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사로잡혔더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고, 깊이 사로잡혔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 저는 증인으로서 어떻게 영적 싸움을 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일요일부터 지금까지 일주일 내내 병원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제 배우자가 환자가 되었고, 저는 그 옆에서 보호자이자 요양사 노릇을 함께 해야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밤까지 스물네 시간을 병실 안에 있어야 하니, 환자는 누워 있으면 되지만 옆에 있는 보호자는 정말 짜증이 납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를 저당 잡힌 셈입니다. 어디 나갈 수도 없고, 평소에 하던 일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꼼짝없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저는 남자입니다. 둘러보니 환자들 옆에는 대부분 따님들이 와 계셨습니다. 제가 있는 병실에는 모두 여자분들이 환자로 누워 계신데, 그 가운데 남자가 보호자로 앉아 있으니 얼마나 어색하고 답답한 자리였겠습니까. 속에서 답답한 생각이 마구 몰려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흔히 어떻게 됩니까. 보통은 환자와 싸우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에서 답답한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짜증으로 드러납니다. 또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그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서 오랫동안 훈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이름을 부르며, 짜증 난 생각이 올라오면 다시 밀어내고, 스마트폰으로 도피하려는 마음이 들 때도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옆에 아이패드도 있었지만 그것도 다 끄고, 정 안 되면 블로그 글을 썼습니다.
그러는 중에 같은 병실에 다른 환자분들도 함께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쪽에도, 이쪽에도 환자가 계셨고 그 옆에는 또 다른 보호자분과 가족들이 모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옆 가족이 들어오자마자 한 말이 어떤 말이었는지 아십니까. 왜 이 병원 주차 시설이 이렇게 엉망이냐는 불평이었습니다. 그 한마디로 시작해 다른 분들도 우리가 왜 이 병원에 왔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또 한 분은 아흔 살이 넘으셨는데 폐렴 환자이셨습니다. 폐렴이면 옮길 수도 있는 병인데, 가만히 사정을 들어 보니 다른 병원에서는 안 받아 주어서 이 병원에서야 겨우 받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또 누군가가 이 병원도 영업이 잘 안되니까 그렇게라도 받아 주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니, 갑자기 속에서 두려움이 또 밀려왔습니다. 폐렴이 여기까지 와서 옮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계속 그 이름을 부르며 마음을 지켰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모든 지식이 함께 임재한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름으로 제 마음을 지키고, 옆에 누워 있는 환자의 마음도 지켜 드렸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병원에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힘들 수 있는 시간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저는 마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고난도의 상황이 또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두 살짜리 아이를 봐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폐렴 환자가 같은 공간에 있는데 두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정말 고난도였습니다.
그때도 제 마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그 이름을 부르느냐에 따라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재합니다. 예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분명히 다릅니다. 아무리 고난도의 문제가 와도 제가 자신을 지키니, 얼굴이 달라지고, 모습이 달라지고,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변화입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성경은 굉장히 두껍습니다. 천삼사백 장에 이르는 분량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있고, 그 안에는 늘 흐르는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에서 인간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 어디입니까. 창세기 3장 1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나옵니까. 인간 바깥에 있던 죄, 사망, 죽음, 사단, 그 모든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전에는 외부에 있던 것들이 이 안으로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문제가 어디서 시작되겠습니까. 바로 이 안에서 시작됩니다. 바깥에서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제 얼굴도 봅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말하고 있습니까. 마음 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늘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다는 표현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또 대한민국 사람들은 특별히 입으로 말은 적게 하지만 눈치로 말한다고 합니다. 눈치로 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서는 계속 대화하면서 그것을 음성으로 내놓지 않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다루는 모든 문제도 그 자리에서 벌어집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바깥의 쓰레기들이 안으로 들어와 사람의 생각을 장악하고, 그 생각이 사람을 행동으로 끌어가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된 문제가 4장에서는 가인이 형제 아벨을 죽이는 일로 번집니다. 가족 자체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그리고 6장에 이르면 그 가족이 커진 공동체가 세계 전체를 장악합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름을 인간이 타락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주셨습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어디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천사를 통해 보호받는 권세, 죽어도 천국에 가는 권세, 그 이름을 부를 때 사단이 깨어지는 권세,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임재하는 권세를 얻습니다. 이 모든 권세의 뿌리가 창세기 3장 15절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성경 전체를 통해 다시 보았습니다. 이름이 정말 중요합니다. 구약에서는 그 이름이 약속으로 주어졌고, 신약에서는 그 이름을 가진 분이 직접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예수라는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도 여러분과 저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임을 이번 주에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세 번째.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입니다. 교회력으로 따져 보면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둘째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이 왜 중요합니까. 본문의 내용을 보면, 이전까지 각 사람의 머리 바깥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이 백이십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육체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각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본인들도 알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방언이라고 부르는데, 그때 마침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 열다섯 나라에서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이십 명이 입을 여는 순간, 열다섯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나라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영어를 배우지 않고 영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독일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최소한 언어 하나를 익히려면 삼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보세요. 말을 제대로 할 정도가 되려면 세 살이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도록 그 언어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그것도 백이십 명이 동시에, 각기 다른 열다섯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것은 어떤 능력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입과 혀에 직접 능력을 주셔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강제로 작동시키신 능력입니다. 곧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지혜가 그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만 따로 떼어 본다면 그것이 무엇이 중요한지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이 본문을 봐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은 창세기 3장 1절부터 21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인간 안에 머물러 계시던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다음, 하나님의 영이 인간 안에서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안에 계실 때는, 생각하는 것도, 지혜로운 것도, 지식을 갖는 것도, 능력을 행하는 것도 자동으로 작동하던 상태였습니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그 영이 늘 함께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떠나 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았습니까. 자기 생각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오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랑뿐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고, 먹는 것과 자는 것과 입는 것을 자랑하고, 이 세상의 권세를 자랑하는 것, 그것이 육체만 가진 인간의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떠나셨던 하나님의 영이 수천 년이 지나, 사도행전 2장에서 백이십 명의 육체 안으로 다시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창세기 3장에서 떠나신 하나님의 영은 그 후로 특별한 소수에게만 임하셨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에게 임하셨고, 솔로몬이라는 사람에게는 지혜로 임하셨습니다. 삼손이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막대한 힘을 행하던 사람입니다. 그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잠깐 들어왔다 나가곤 했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잠시 임했던 그 성령이, 사도행전 2장에서는 무려 백이십 명에게 한꺼번에, 그것도 일방적으로 그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부터 28장, 로마서로 쭉 이어지면서, 이제 우리에게는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만 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대로 그 안에 들어오시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저 자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에, 그 성령이 안에 계시면서 여러분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안에서 말씀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확신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게 하시고, 사리분별을 하게 하시고, 현실을 보게 하시는 그 모든 일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후 마침내 다시 들어오신 그 결정적 전환점이 바로 사도행전 2장이라는 사실입니다.
네 번째.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 중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짚어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결론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
대한민국에서 성령강림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교단이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한 순복음 교단입니다. 그분들은 사도행전 2장을 매우 강조하고, 그중에서도 방언과 예언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강조합니다. 저번 주에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성령강림 하면 성령만 따로 떼어 어마어마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켜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그 흐름이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저번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강림은 첫째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완벽한 증거입니다. 성령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시매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재하셨다는 사실에는 분명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신다는 것,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것,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공중의 하나님 나라에 계시다는 것, 그 모든 전제 위에서 비로소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2장부터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성령만 나옵니다. 그러면 성령은 동떨어진 다른 분이신가, 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든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전제 위에서, 그 전제와 늘 함께 움직이도록 세팅되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모든 문제가 내 안에서 벌어진다는 사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어디에서 벌어집니까. 내 안에서 벌어집니다. 바깥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아무리 사고가 많이 나고, 우환과 질고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 안입니다. 바깥이 아닙니다.
그 안을 가만히 추적해 보면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내 자아가 있고,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끊임없이 정보가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내 자아와 어떤 정보를 가진 어떤 존재가 대화하는 구조입니다. 그 대화를 통해 내가 행동합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생각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인지심리학에서 다루는 ABC 이론, 곧 액티비티 사건과 비빌리프와 시컨스 결과의 구조를 기반으로 이 부분을 추적하고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고, 가치관이 형성되고, 결국에는 운명과 팔자가 정해집니다.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모든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무엇입니까. 내 자아와 누군가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바깥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한 일과 부정적인 일은, 내 자아와 부정적인 어떤 존재가 부정적인 정보를 주고받으며 내 자아가 그것을 그대로 오케이 받아 행동으로 옮기는 구조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다 안에서 벌어집니다. 가만히 살펴보세요. 내 자아는 무조건 오케이부터 합니다. 어떤 생각이 몰려오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가릴 것 없이 받아들입니다.
오늘처럼 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수많은 생각이 들어올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자아는 그것을 또 오케이로 받아들이며 그때마다 감정이 세팅됩니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얼굴에 드러나고, 다른 사람도 그것을 읽어 냅니다.
모든 전쟁은 어디에서 벌어집니까. 이 안에서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아무리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셔도, 사람은 일이 초만 무섭다고 반응하고는 곧 또 달라집니다.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 인간은 안에 사단을 들이고 살고 있습니다. 안에 죄가 들어와 있고, 안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 쓸데없는 생각, 패배적인 생각, 나가 나를 죽이는 생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우리 자아를 작동시키니, 마가복음 7장 21절부터 23절 말씀처럼 온갖 악한 생각이 흘러나옵니다. 살인하려 하고, 음란하려 하고, 도적질하려 하고, 간음하려 하고, 우상숭배하려 하는 생각이 그저 흘러나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스물네 시간, 삼백육십오 일입니다. 잠을 잘 때는 도리어 더 드러납니다. 잠을 자면 과거의 기억까지 다 끌고 들어와 작동합니다.
저는 가 본 적이 없지만, 중동 지역에 가면 땅을 파기만 해도 원유가 그냥 나온다고 합니다. 인간 안에서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생각이 꼭 그와 같습니다. 잠시 좋은 생각을 하느라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잠시 멈춥니다. 그러나 스물네 시간을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은 그중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바깥에 나가면 텔레비전을 켜도 전쟁뿐이고, 온라인으로 보는 쇼츠도 결국은 자극적이고 좋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좋지 않은 것을 본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곧장 야 저런 일이 일어나는데 너는 걱정되지 않느냐, 라는 목소리가 따라옵니다. 걱정, 근심, 불안, 우울, 답답, 짜증이 누적되고 또 누적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는 다 이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이 안에 거하시는 일입니다.
와이파이의 비유와 성령의 동시 임재
여러분, 만약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그대로 이 땅에 계셨다면 큰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약 팔십억 명입니다. 팔십억 명이 모두 예수님 한 분을 만나야 합니다. 한 사람당 일 초씩만 잡아도 줄을 끝없이 서야 합니다. 잠깐 만나 내 문제를 말씀드리고 또 돌아서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또 문제가 생기면 다시 가서 줄을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어도 한 분이시고, 육체를 가지고 계시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어쨌든 바깥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만나려면 그분이 계신 장소까지 가야 하고, 직접 대화를 나누어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임하신 성령께서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가셨기에 이 안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나와 떨어져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성령은 이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리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사도행전 2장의 성령님은 예수님과 다른 분이신 하나님으로서 이 안에 거하시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똑같이 말씀하시고, 이끄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쉽게 한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와이파이를 사용하시지요. 이번에 병원에 있어 보니 거기도 와이파이가 있었습니다. QR코드를 찍으니 자동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일일이 그분을 직접 만나야 했겠지만,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와이파이에 연결만 되면 동시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왜 유익입니까. 너희가 나를 직접 만나려 하면 힘들지만, 내가 아버지께 가면 성령을 보낼 것이고, 그때부터 너희는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그리고 어느 장소에 있든지 상관없이 임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일입니까.
가장 발광하는 시간, 그 자리에 계시는 성령
성령이 오신 사건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 모든 문제가 안에서 생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안의 문제가 가장 발광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입니까. 혼자 있을 때입니다. 밤 늦게 혼자, 외로울 때, 잠자기 전, 바로 그 시간에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그 생각이 그저 가볍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끌어와 함께 몰고 오고, 미래까지 끌어와 함께 몰고 옵니다.
저도 병원에 있어 보니 잠을 자는 시간 자체가 왜 그렇게 길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자지도 못합니다. 한 시간마다, 두 시간마다 불이 켜집니다. 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보호자가 누워 자는 자리는 왜 그렇게 좁은지, 끝까지 가도 발이 끼어 나옵니다. 마치 이코노미석에 앉아 열네 시간을 잠들지 못한 채 비행기 안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습니까. 불을 끄고,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을 때입니다. 저는 바깥에서는 거의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니, 그 시간에는 정말 아무 자극이 없는 채로 그저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면 생각이 쫙 몰려옵니다.
야 너 어떻게 할 거냐. 야 너 저 사모가 저렇게 하다가 잘못되면 어떻게 할 거냐. 야 너 산재 보험도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 그런 생각이 한꺼번에 쫙 밀려옵니다. 그러면 속에서 나는 돈도 별로 없는데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하지, 라는 두려움이 따라 올라옵니다. 갑자기 저 상태로 가다가 나도 한순간에 가난해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옵니다.
이런 일이 어느 때 일어납니까. 불을 끄고 나 혼자 있는 밤 늦은 시간에 밀려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내가 내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머리를 흔들거나, 남자라면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식으로 해결해 보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안에 있는 기분을 잠시 멈추게 할 수 있을 뿐, 동일한 조건의 환경이 다시 오면 그대로 또 작동합니다. 안에서 스물네 시간 마음을 장악해 숨 막히게 하는 그것이 진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안에서 작동하는 사단의 생각,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라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제 사단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우리 안에서 싸울 수 있고,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아멘.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함
저는 저번 주 말씀을 기반으로, 이번 한 주 동안 다른 할 일도 별로 없으니 사도행전 2장만 계속 묵상하며 지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땅을 쳐다보며, 옆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저 그 본문 하나만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안에 계신 성령님은 가만히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막 능력을 행하시고 병을 단숨에 고치시는 그런 단일한 차원의 분만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잔잔히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병원에 있어 보니, 스물네 시간 저 혼자만 있다면 그래도 말씀을 붙잡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데, 가만히 있으면 옆 사람들의 말이 그대로 들려옵니다. 여기서도 들리고 저기서도 들리고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말 가운데 좋은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저거 안 좋다, 안 좋다, 안 좋다, 아프다, 어떻다, 그 말만 나옵니다. 기분 좋다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고, 웃는 이야기도 단 한마디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그 일주일 동안 웃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아십니까. 세 명의 아이들이 병원에 찾아왔을 때 그때 한 번 웃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외에는 웃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깥에 어떤 전쟁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내 마음을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로 지킬 수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성경은 단순합니다. 예배 잘 드리고, 기도 잘하고, 헌금 잘하고, 봉사 잘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주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일 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시간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비밀이 바로 그 이름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하나님의 모든 것이 임재하는 그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얼마나 부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성경의 모든 주제가 이것이고, 신앙인은 그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부르느냐에 따라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 이름을 부를 때, 깊이가 달라지고 높이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그 이름을 불러 내 마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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