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내안에교회 주일예배 2026.06.28. '성령은 내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6월 28일 주일말씀

성령은 내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본문. 요한복음 16장 13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은 내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세상을 보면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살고 있고, 쇼츠를 끊임없이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구석에 있든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곧바로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보고 있는 정보들은 사실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정보가 흘러나오는 출처가 전 세계 유수의 가장 유력한 매체들이고, 그 매체마다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방향으로, 어떤 분위기로 다가오는지가 매체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의 노예가 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시대 한가운데서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누릴 것인가, 바로 그 측면에서 오늘 세상을 다시 바라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6장 13절이고,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음식 앞에서 부른 이름

저는 이번 주 내내 사모님이 또 편찮으셨습니다. 허리가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밥을 드시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결혼 생활을 몇십 년 해 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돌아보면, 첫째 아이가 사모님 뱃속에 있던 그 입덧 시기였습니다. 그때 사모님은 무려 15일 동안 거의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셨고, 몸무게가 39kg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시간을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모님이 60대를 한참 넘기신 때입니다. 허리 통증은 이제 둘째 문제이고, 진짜 문제는 그 시절 입덧과 비슷한 증세가 다시 찾아왔다는 점입니다. 무엇이든지 입에 들어가면 다 뱉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자꾸 음식을 상상하시고, 저것은 좀 먹어야겠다 하시는데, 막상 가져다 드리면 한 모금 드시고 그냥 두십니다. 그러니 몸무게가 늘지 않습니다.

엊그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좀 비싸게 시켜다 드렸는데 그것도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둘이 마주 앉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계속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그 자리에서 그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않으니, 정말 이 이름 외에는 답이 없겠다는 절실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부르고 사모님도 부르셨습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한참을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 이제 드십시다, 했더니 드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속으로 어, 되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저 드시는 일에 집중하시도록 곁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배민이라는 신세계

어제 아침에는 어떤 음식이 드시고 싶다고 하시기에 또 배달을 시켜서 드시게 했습니다. 요즘 제가 조금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시장 보는 일을 누군가에게 배워서, 이제는 배민 앱으로 직접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앱에서 쭉 주문만 하면 오토바이가 옵니다. 여러분,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쇼핑몰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필 배민으로 음식을 시키는 일만큼은 여태까지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곁에 잘해 주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만 하면 다 알아서 해 주시니, 제가 따로 손댈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이 못 하시게 되었으니, 제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네 번 시켜 봤습니다. 이게 그야말로 신세계입니다. 내가 왜 그동안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시장에 나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시키고 저것도 시키고 막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킨 음식도 사모님이 잘 못 드십니다. 또 어쩌겠습니까. 다시 거울 앞에 마주 앉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한참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또 드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절실한 자리에서 그 이름을 불렀고, 결국 음식이 뱃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생의 주제, 부정적인 생각과의 싸움

저는 영적 싸움을 늘 합니다. 저 자신이 예전과 달라진 모습이 분명히 보입니다. 왜 그런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평생 주제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마음속에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늘 제 삶의 주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목사가 된 것도, 제가 목회하는 모든 방향도, 처음에는 성도들을 위한 방향이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한 방향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알면서도 왜 내면에서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오는가, 그것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이것이 저의 평생 숙제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이름을 불러야만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훈련을 통해 배웠습니다. 무려 군 생활 3년 동안 매일같이 훈련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다 뒤집어 끄집어내어, 뿌리까지 뽑아서 다 바꿔 본 시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지금도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부르고 있는 제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저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축구 경기 한 장면에서 또 시작된 싸움

이번 주에는 또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경기를 보기도 전에 이미 속에서 결론이 나와 있었습니다. 야, 저것은 이미 안 돼.

그런데 옆에 사모님이 텔레비전을 켜 놓으셨습니다. 저는 무엇인가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는데, 슬쩍 시선이 가더라고요. 그래도 안 봤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속에서 내 생각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내 말이 분명히 맞다, 저 경기는 안 된다, 99.99퍼센트 결론이 맺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슬쩍 봤고, 슬쩍 본 김에 조금 봤습니다. 한 1분 정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결론은 제가 말한 대로였습니다.

그 순간 속에서 어떤 생각이 올라오는지 아십니까. 야, 네 결론이 맞잖아. 그런데 너는 또 텔레비전을 보네. 이 멍청한 자식. 정죄가 깔리면서 저 자신에게 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기느라 또 한참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유튜브를 열기만 하면 쇼츠에 축구 영상만 떠오릅니다. 보지 않으려 해도 알고리즘이 제 생각을 똑같이 따라가는지 계속 띄워 줍니다. 안 봐야지 하면서도 잠깐 보고, 또 잠깐 봅니다. 그러면서 속에서 답답함이 계속 쌓여 갑니다. 마치 고구마를 한꺼번에 잔뜩 먹은 듯한 그 막힌 느낌이 가슴에 차오릅니다.

지금도 속에서 그 짜증이 올라오고 있고, 저는 그 짜증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으로 계속 꺼내고 있습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축구를 수십 년 봐 왔으니, 이 습관이 그렇게 단번에 정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오늘 제목은 성령께서 내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목과 직접 연결되는 핵심 키워드가 있습니다. 내 생각이, 내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그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 가겠습니다.

하와의 마음 깊은 곳에 깔린 한 가지 확신

창세기 3장에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지에 대한 근원이 나와 있습니다. 그 근원으로 인해 그 이후 수많은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니, 거기에 결정적인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 열매를 먹습니다. 그 순간 하와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었습니까. 내가 옳다. 내가 저것을 먹으면 분명히 하나님과 같이 된다. 내 판단이 옳다. 내 결정은 확실하다. 그 결과에 대해서도 나는 100퍼센트 확신한다. 이것이 그저 100퍼센트로 안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을 먹고 인간은 그대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그 자기 판단의 근원으로 들어오는 정보가 무엇이었습니까. 인간보다 더 우월하고 인간이 착각할 만큼 거대하고, 인간이 그 능력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주는 정보였습니다. 그 정보를 인간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순간부터 외부에 있던 사단의 모든 것이 인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에 계시던 하나님의 영은 떠나시고, 사단의 영을 통한 인간의 영이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안에서는 내 생각은 무조건 옳다는 사고가 자동으로 올라옵니다.

창세기 3장 이전에 인간은 어떠했습니까. 밖에 있던 사단이 잠시 내 판단이 옳다는 식으로 흔들어 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이후부터는 100퍼센트 안에서 내 판단은 무조건 옳다는 흐름이 올라오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맞다. 내 결정은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신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받들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 판단과 내 결정에 반대하면, 그 사람은 곧장 적이 됩니다. 이렇게 안의 가장 밑바탕이 100퍼센트 장악된 채 인간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100퍼센트는 결코 해결자가 되지 못합니다

이 판단이 100퍼센트 옳다는 흐름의 무엇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우리는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까. 정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지 못합니다.

내가 100퍼센트 옳다는 그 흐름이 결국 어디로 흘러갑니까. 다 부정적인 쪽으로 흐릅니다. 나를 멸망시키고 다른 사람까지 멸망시키는 쪽으로 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문제뿐 아니라, 그 이후의 문제까지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인간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쌓은 경험만으로 판단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에서 100퍼센트 내가 옳다고 외치는 그 흐름을 바꾸시기 위해 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네 판단은 100퍼센트 맞지 않다. 네 판단으로 결정하고 행동해서는 네가 안고 있는 가장 깊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 문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 그래서 주신 이름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도 그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내가 100퍼센트 옳다는 그 견고한 자기 판단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가만히 살아 보면 그렇습니다. 저도 무조건 내가 옳은 쪽으로, 제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자꾸자꾸 부르다 보니, 제 판단을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려 할 때 그 이름을 부르면, 잠시 멈춰지게 됩니다. 그 잠시 멈춰지는 순간에 비로소 객관적으로 다시 한번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판단을 미루고, 결정을 미루고, 행동을 한 박자 늦추게 됩니다. 이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저는 그렇게 살아오면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하세요?

오늘은 내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키워드로 풀어 가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두 부류의 인간

선악과를 먹고 안에 사단의 영이 들어와 사단의 자녀가 된 모든 인간은 한 가지 흐름 안에 살아갑니다. 내 판단은 무조건 옳다. 나는 내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내가 안고 있는 저주와 재앙과 사주팔자, 운명, 이 모든 문제를 나는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한 자기 확신 위에서 살아가는 부류가 한쪽에 있습니다.

또 다른 한 부류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아무리 판단하고 애써도, 내 죽음의 문제, 내 죄의 문제, 사람에 대한 문제, 그리고 영원한 멸망의 문제는 내 판단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수 있는 그 이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을 붙잡아야 한다. 이렇게 두 부류의 인간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흘러왔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던 사람들은 구약에서도 구원을 얻었고, 결국 신약에 그 이름이 직접 등장하게 됩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 신약 성경에 등장하시는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 이것이 신약 전체의 선포입니다.

요한복음 14, 15, 16장은 성령에 대한 유언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20장 30절과 31절에 그 의미가 정리되어 있고, 21장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승천하시고, 사도행전 2장에 성령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완전히 증명된 후에, 그분의 영을 우리 안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내심은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지만,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6장 1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미리 말씀하신 자리입니다. 야, 이 성령이 온다. 꼭 와야 한다. 죽기 직전에 그분이 오셔야 너희에게 유익이 된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때 당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승천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계속 머무셨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오늘날 세계 인구가 80억 명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문제가 하나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셀 수도 없이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이 아무리 부활하시어 하나님이시라 하더라도, 만나려면 어딘가 한 장소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분께 가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만나고 돌아와야 합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만 해도 몇십억이 됩니다. 그래서 그분은 올라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성령이 와야 한다. 그리고 그 성령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14장, 15장, 16장은 사도 요한이 쓴 복음서 안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성령에 대해 가장 자세히 말씀하신 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리를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고, 오늘 16장 13절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는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은?

다섯 주에 걸친 흐름 정리

오늘은 성령강림 후 다섯째 주일입니다. 성령강림 이후는 모두 27주까지 이어지므로, 금년에 어디까지 다룰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5주째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은 곧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가장 결정적이고 완벽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말은 그저 성령이 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려면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계셔야 하고,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하고,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셔야 하며,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시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버지께서 완전히 증거하시고 인정하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증거이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은 곧 이 세 분이 함께 세트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첫째 주의 주제는 믿는 자의 육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이 단지 어디 멀리에 계신 분이 아니라 믿는 자의 이 육체, 여러분과 저의 이 육체 안에 들어오셔서 지금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것, 

둘째 주의 주제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내면과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차원이 다른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셋째 주의 주제는 성령이 제자들 마음속에 오셔야 할 이유였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 어디에서 벌어집니까. 안에서 벌어집니다. 언제 가장 격렬해집니까. 밤늦게 혼자 있을 때입니다. 예배 자리에 있을 때는 잠시 잠잠해지지만, 혼자 있을 때 모든 일이 시작되고, 모든 음모도 밤에 혼자서 펼쳐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께서는 반드시 우리 안에 들어오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넷째 주, 곧 지난주의 주제는 성령은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나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안에서 무엇이 떨리거나, 갑작스레 충동이 일어나거나, 뜨거움이 솟구치는 분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흘러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자꾸 떠오르게 하시고, 그 말씀의 방향으로 나를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다섯째 주의 주제, 성령은 내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선 내 위치를 먼저 확인합시다

오늘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지금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내 현재 위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다음. 모든 문제 끝. 모든 문제 끝. 모든 문제 끝.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그분이 다 이루셨습니다. 모든 문제가 끝났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혼의 문제까지 모두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지금 제가 안고 있는 불평, 가난, 그 외의 모든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끝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모든 문제 끝. 모든 문제 끝.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마귀야 가라.

내 생각 안에서 부정으로, 불평으로, 멸망으로 끌고 가려는 모든 사단의 생각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는 순간 끝납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마귀의 생각이 끊어집니다.

다시.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우리가 왜 이 다섯 가지를 반복해서 외칩니까. 이것이 내 현재 위치이고, 동시에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이며, 문제가 생겼을 때 풀어 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풀기 전에, 여러분과 제가 먼저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정보가 들어오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어떤 정보가 들어오면 그것을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크게 보면 그 흐름은 단순합니다. 정보가 들어온다, 판단한다, 행동한다.

그런데 그 사이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는 수많은 대화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 예배에 가야지, 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속에서 곧장 이런 대화가 시작됩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 그 사람이 와 있을까. 그 사람을 보면 어떻게 인사할까. 전철을 탈까, 차를 가지고 갈까. 이렇게 내 자아와 어떤 생각이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래, 이게 맞다, 확실하다, 이렇게 하자, 라고 결정한 다음에야 행동에 옮깁니다.

그런데 내가 최종적으로 그래, 이게 맞다, 100퍼센트 맞다, 이제 결정했으니 행동해야 한다, 라고 말할 때, 그 안에는 무엇이 깔려 있겠습니까. 그 결정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실패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분명히 이것은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난센스가 있습니다. 인간은 저를 포함해서, 내가 지금 맞다고 판단하는 그 자리의 수준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다 내 수준입니다. 내 생각의 수준, 내 지혜의 수준, 내 경험의 수준, 내가 지금 서 있는 위치의 수준, 그 정도 안에서밖에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100퍼센트 맞다고 우깁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내 판단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데, 나는 그 한계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 나는 신이 되어 무조건 맞다고 밀어붙입니다. 그런데 막상 살아 보면 안 맞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식 이야기,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뜨거운 주제가 무엇입니까. 주식 투자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도 주식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사실상 안 하시는 분이 없는 시대입니다.

저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SK하이닉스는 못 샀습니다. 너무 비싸기 때문입니다. 하이닉스도, 삼성전자도 한 주 살 돈이 안 되었습니다. 삼성전자가 그동안 얼마나 올랐습니까. 그러니 그때도 못 샀고, 지금도 못 삽니다.

그래서 무엇을 샀느냐. 다른 것을 샀습니다. 요즘 주가가 만 단위를 넘어 9천, 어떤 날은 8,300, 8,700까지 쭉 올라가고 있다는데, 하필 제가 산 주식은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올라가면 오르고 떨어지면 떨어지는, 그 변동에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짜증이 좀 납니다. 그래도 저는 큰 손해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식을 사기 직전에 어떤 상태였습니까. 100퍼센트 맞다. 분명히 그대로 갈 거다. 변동은 있겠지만 큰 변동 없이 어느 정도까지는 갈 거다. 그렇게 다 확신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결과를 보면, 신문에 천천히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레버리지로 큰 손해를 본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SK하이닉스 같은 종목에서 레버리지로 들어갔다가 손해를 본 분들이 정말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속에서 내가 옳다는 확신이 100퍼센트 있었는데, 결국 결과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친구의 1억과 우주항공 상장 사건

이것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경험만으로도 그렇습니다.

제 친구 가운데 주식으로 큰 손해를 본 분이 있습니다. 저는 투자해 봐야 100단위 정도의 적은 금액으로 했는데, 그 친구는 천 단위에서 했습니다. 5천 단위가 넘었고, 거의 1억 가까운 금액이었습니다.

저번에 미국 시장에 스페이스X 관련 종목이 상장한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것은 분명히 된다, 분명히 오른다 하며 거기에 큰돈을 넣었습니다. 수십 년 주식을 해 오신 분이니, 자기 나름의 수많은 연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스페이스X 관련 종목을 한 주도 사지 못했습니다. 아예 매수할 수 없게 막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미리 투자되어 있던 미국 쪽 관련 종목들이 한꺼번에 쫙 떨어졌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매일 하한가였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까지 떨어졌는지 아십니까. 이번 주에 17000원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분명히 맞다고 100퍼센트 확신했는데, 자기 계획이 안 맞고, 자기 판단이 안 맞고, 결과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세상 판단의 한계와 더 큰 문제

왜 제가 이 예를 길게 말씀드리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내가 분명히 맞다, 내가 확실하다, 라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에서는 손해를 보고 돈을 잃는 정도로 끝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차원의 일은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나 자신뿐 아니라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우환, 질고, 운명, 사주팔자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한다. 조상 대대로 끌고 내려오는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직접 결부된 가난과 질병과 무능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100퍼센트 내가 맞다, 내가 처리한다, 그렇게 60년을 살아왔다고 한들, 해결된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더 큰 우주적이고 근원적이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그 문제는, 결코 인간의 판단으로 풀 수 없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인도하신다는 말씀의 의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면, 인간의 그 근원적이고 절대적이며 광범위하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문제를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데 인도하신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과정입니다. 거기에는 시간표가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는 많은 저항이 있고, 실패도 있고, 어느 정도의 성공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드러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방향이 어디입니까. 진리 가운데로 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계속 부를 때,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기도 하지만, 그 이름을 일단 기본으로 부르고 살아야만 나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여기서 가장 결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어쨌든 그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부르면서 그 이끄심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직장 상사의 한마디에서 시작되는 분노

여러분, 직장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준비를 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상사가 그것을 보고 한마디 합니다. 야, 그거 틀렸어. 그 순간 기분이 좋겠습니까. 좋지 않겠습니까. 속에서 곧장 화가 올라옵니다. 남자들끼리는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내 판단이 옳다는 확신, 내가 분명히 맞다는 100퍼센트의 확신이 안에 깔려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흔드는 한마디를 던지니, 곧장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뉴스를 볼 때 일어나는 마음의 작동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뉴스를 봅니다. 어떤 정당의 이야기가 나오고, 다른 정당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늘 상반된 입장이 나란히 보도됩니다. 이쪽 의견도 나오고, 저쪽 의견도 나옵니다.

그러면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나는 저쪽 편이니까, 반대쪽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 순간 곧장 속에서 열이 끓어오릅니다. 이 사람들 왜 이런 소리를 하지. 내가 옳은데. 너희가 틀렸어. 이 외침이 안에서 자동으로 시작됩니다.

분노가 올라오고 짜증이 튀어 오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됩니다. 내가 옳다, 라는 그 주장이 안에서 계속 자기 자신에게 외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말이 맞아. 너는 틀려. 이 외침이 끊이지 않습니다.

자녀를 향한 지시 한 번에서 드러나는 마음

또 다른 자리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자녀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지시했는데 자녀가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곧장 속에서 무엇이 튀어 나옵니까. 뭐가 어떻게 틀렸어, 왜 안 한다고 해. 곧장 한마디가 튀어 나옵니다.

이 모든 흐름의 뿌리에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옳다. 나는 확실하다. 나는 100퍼센트 맞다. 그 혼잣말이 안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있고, 내 자아는 그 혼잣말을 계속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고집이 세다, 라고 합니다. 특별히 저처럼 나이가 들어 가는 사람들을 두고 사람들은 고집이 세다, 완고하다, 완강히 저항한다, 저 사람은 대화가 안 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성격이 안 좋으냐,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안에 들어가 보면 무엇이 흐르고 있습니까. 내 생각이 맞아. 내 말이 맞아. 절대 맞아. 네가 틀렸어. 이 외침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내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들어오는 순간 곧장 튕겨 나갑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다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적용을 말하면서 분명히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방금 제가 말한 그 사람이 결국 저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최씨입니다. 그리고 고집이 정말 셉니다. 어머니에게서 그 모습을 많이 봐 왔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한번 맞다고 생각하시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사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저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톨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과 별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의 진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람 속에서는 자기 생각과 자기 자아가 자기 생각만을 끝없이 고집하고 고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다 누군가가 그 자존심을 건드리는 한마디를 하면 곧장 분노가 튀어나오고, 남자라면 행동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은 하지만 조금만 인정합니다.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왔다 하더라도, 저거는 내 거 아니다, 하면서 끝까지 내 판단을 고집합니다.

제 고집이 달라진 단 하나의 계기

그런데 제 고집이 분명히 달라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계기였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계속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계속 부르다 보니, 어느 순간 제 판단과 제 고집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것을 내가 100퍼센트 신으로 떠받들고 있구나. 그것을 0.001초의 짧은 순간에도 절대 놓지 않고 붙잡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제 경험에 무슨 한계가 있겠습니까. 제가 만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많은 사람을 만난 편입니다. 그러나 저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난 분, 저보다 더 깊은 경험을 가진 분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경험만을 신으로 섬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계속 부르니, 속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네 판단이 틀릴 수도 있어. 네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어. 네 판단은 네가 경험한 것만을 근거로 한 거잖아. 네가 만난 사람들만을 근거로 한 거잖아. 네가 살아온 그 과거의 데이터 위에서 나오고 있는 거잖아.

그러면서 제가 제3자의 입장에서 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지 않았다면 저는 죽을 때까지 내 말이 맞다고 우겼을 것입니다. 틀린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고 내 말이 맞다, 그것만 붙잡고 살았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방식

그렇다면 여기서 왜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라는 그 작은 생각이 안으로 들어오고, 또 자꾸자꾸 커졌겠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령과 연결해 봅시다. 우리는 흔히 성령의 인도라고 하면 어떤 장면을 떠올립니까. 속에서 갑자기 네 생각이 틀렸어, 라는 음성이 들리고, 하늘에서 빛이 빵 내려오고,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강한 충격이 오는, 그런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는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 부르면, 속에서 잔잔히 이런 생각이 일어납니다. 야, 네 생각이 틀릴 수도 있잖아. 네 생각에는 이런 부분의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이런 부분의 단점도 있잖아. 네가 지금 판단하는 것은 이런 조건 위에서 내린 판단이잖아. 그런데 그 조건은 더 큰 범위에서 보면 맞지 않잖아.

이렇게 성령께서는 제 판단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더 큰 조건 위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시고, 더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하시며,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새로운 생각을 안에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방식입니다.

이번 주 제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

저는 이번 주에도 이것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누군가가 야, 네 말은 틀렸어, 라고 한마디만 던져도 속에서 곧장 발끈했습니다. 표정에는 표시를 잘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얼마나 고상한 척하려고 애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속에서는 이미 욕이 한바탕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누가 반대하면 제 안에서 이런 음성이 먼저 일어납니다. 한번, 어, 그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제 마음이 훨씬 유연해졌습니다.

유연해졌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네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 네 생각이 이런 조건 위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붙잡고 있는 생각을 다른 측면에서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그렇게 한 박자 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 부르니,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자꾸자꾸 그런 생각을 마음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어떤 결정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의 말 때문에 속에서 화가 올라올 때, 누군가 내 판단에 반대할 때, 그 자리에서 잠시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판단이 잠시 멈춰지고, 그 멈춤의 순간 안에서 성령께서 더 큰 자리, 더 넓은 자리, 더 진리에 가까운 자리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마무리 기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내 판단이 옳다는 그 자리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심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의 판단을 더 큰 자리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결정을 그리스도의 기준에서 다시 점검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차분히 이끄소서. 분노가 올라올 때, 고집이 솟아오를 때, 내가 맞다는 외침이 안에서 커질 때, 잠시 멈추고 그 이름을 부르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 시간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이 주의 복음 위에 온전히 쓰이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한 주간 동안 말씀 붙잡고 응답받기를 소원하는 주의 모든 사명자들과 내안에교회 성도님들과 이 시간 온라인으로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왜 나는 매번 시작만 하고 멈출까? —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왜 나는 매번 시작만 하고 멈출까? —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결심이 오래가지 않는 진짜 이유 또 멈췄다 재현은 이번에도 3일째였습니다. 첫날은 됐습니다. 둘째 날도 됐습니다. 셋째 날 저녁, 회식이 있었습니다. 늦게 들어왔습니다. 피곤했습니다. 그날 안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습니다. "어제 끊겼으니까 오늘은 다시 시작이네." "역시 나는 꾸준함이 없어." "의지가 약한 건가." 재현은 이 패턴을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다이어트. 운동. 독서. 매번 시작했고, 매번 같은 지점에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정말 의지 문제였습니까?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지가 약하다." 그런데 정확하게 봅시다. 재현이 밥을 먹는 것은 의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상황이 행동을 만듭니다. 재현이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은 의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알림이 오면 봅니다. 습관적으로 잠금을 풉니다. 조건이 행동을 만듭니다. 인간은 기억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늘 해야지"*라고 기억해서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는데 를 *"기억날 때 해야지"*로 설계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억이 약한 날, 피곤한 날, 바쁜 날. 안 됩니다. 기억은 상황보다 약합니다. 문제는 의지가 약한 게 아닙니다. 구조가 없는 겁니다. 감정 기반 실행의 한계 수진을 봅시다. 기분 좋은 저녁에는 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는데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생각이 멈춥니다. "오늘은 잘 됐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로 바쁩니다. 상사 카톡이 와 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완전히 잊었습니다. 왜입니까? 기분 좋은 저녁에 됐던 건 수진의 감정 상태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아침에 안 됐던 건 감정 상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기준이면 ...

세대를 넘어 울린 복음”… ‘복음 소나타’ 2일차 마츠모토 공연 성료

“세대를 넘어 울린 복음”… ‘복음 소나타’ 2일차 마츠모토 공연 성료 시니어·어린이·다국적 참여 속 문화 전도의 확장 가능성 확인 2026년 4월 16일 오후 7시, 일본 마츠모토 하타문화센터에서 열린 ‘복음 소나타(Gospel Sonata)’ 2일차 공연에 많은 초청 관객이 참여했다. 이번 공연은 예수사랑교회가 주관한 일본 선교 캠프 일정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으며, 내안에교회(Naeane Church, Church in Me) 최재곤 목사는 현장 일원으로 참여해 낮에는 마츠모토 지역을 함께 다니며 주민들을 초청하고, 저녁 공연까지 전 과정을 함께했다. 이번 2일차 공연은 👉 현장 초청 기반 참여 확대 라는 특징을 보였다. 캠프 참가자들은 공연 당일 오전부터 마츠모토 지역을 직접 다니며 현지 주민들을 초청했으며, 그 결과 👉 시니어층을 포함한 다양한 연령대가 공연에 참여했다. 특히 👉 고령의 한 교회 성도가 휠체어를 이용해 공연장을 찾는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 이는 공연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과 참여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 세대 통합형 공연 구성 이번 공연은 👉 어린이부터 시니어까지 함께하는 구조로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 유치부부터 초등부 학생들까지 함께 참여했으며 👉 약 50~70분간 어린이 공연과 일본 관련 영상, 예수사랑교회 공연팀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또한 전체 공연은 👉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은 👉 단순 공연을 넘어 👉 자녀에게 국제적 경험을 제공하려는 부모들의 선택 속에서 이루어진 참여 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 참여 규모 및 현장 구성 이번 공연에는 👉 약 180명의 한국 참가자들이 함께했으며 나가노 지역 예수사랑교회에서는 👉 간식과 선물을 준비해 초청 관객들을 맞이했다. 또한 👉 1일차와 동일하게 이민숙 가수 CD 음향 스피커 등이 제공되었다. 현장에서는 👉 응원봉, 응원 팔찌, 드레스 코드 착용 등...

[내안에교회 초급훈련 A1]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당신은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 느낌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나는 전이랑 완전히 똑같은데?" "이건 괜히 시간 낭비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멈춥니다. 그런데 멈추기 전에 질문 하나만 더 해봅시다. 당신에게 정말 아무 변화도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즉각적인 체감이 없었다" 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결론을 너무 빨리 내린 걸까요? 느낌은 변화를 측정하는 가장 늦은 지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효과가 있다면 즉시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구조적인 변화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운동을 시작한 첫날에 근육이 눈에 보입니까? 당신이 투자를 시작한 첫날에 수익이 확정됩니까? 당신이 약을 한 번 먹었다고 병이 바로 낫습니까? 대부분의 변화는 아주 미세한 틈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자동으로 흘러가던 흐름이 1초라도 느려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하지 않네. 그렇다면 무효야."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체감이 없으면 그 즉시 실패 판정을 내려버립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끝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급함입니다. 그래서 기록을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해봅시다. 당신은 논리적인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실험해봅시다.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확신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측정하자는 겁니다. 7일 기록 실험 방법 오늘부터 7일 동안, 당신은 하루에 딱 1분만 투자합니다. 매일 이 세 가지를 기록하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당신이 "예수는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