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주일말씀
성령은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나게 하신다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넷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을 보면 성령강림 이후가 무려 스물일곱 주까지 이어지는데, 그만큼 성령강림이라는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의 흐름으로 보면 어디쯤에 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도행전을 지나고, 로마서를 지나, 요한계시록의 어느 시점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똑같이 성령강림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이 스물일곱 주 동안 우리가 과연 성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동안 사용해 온 성령 충만이나 성령 임재 같은 단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를 함께 점검하면서, 계속하여 성령에 대한 말씀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넷째 주입니다. 오늘의 제목은 성령은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의 핵심 키워드는 생각으로 기억나게 한다, 잊어버리지 않게 하신다, 그것입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꿈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어떤 장면이 있었는가, 그것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그런데 제 옆에 계신 사모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거의 매번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꿈에서 전도했다, 꿈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다. 그 비슷한 이야기를 거의 매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 기분이 좋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누구한테 쫓겨 다녔다거나, 사기를 당했다거나, 누구를 쫓아갔다거나, 그런 헤매는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에서 꿈으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 직전에 꾸었던 꿈이니, 일어나도 도무지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개운하지 않은 기분이 그대로 그날의 출발점이 되어 따라옵니다.
이때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루 가운데 가장 정신이 맑은 시간이 아침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시간에 어떤 기분과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가 그날 전체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아침 그 시간마다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계속 그 이름을 외칩니다. 마음속에 그 말씀이 안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결의 문제가 있습니다. 갑자기 아침에 눈을 뜨면, 지금은 조금 덜해졌지만 체력이 왕성했던 시절에는,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먼저 돌아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뭐 해야지. 오늘 누구 만나고. 오늘은 또 누구를 만나야지. 빨리 뭘 해야 되겠지. 자녀는 어떻게 해야 되지. 머리가 그렇게 한꺼번에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곧장 일어나 정신없이 일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에 끌려가는 순간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한참 지난 다음, 힘들어지거나 막힐 때에야 비로소 그 이름이 떠오릅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모든 문제가 끝났다는 약속, 마귀가 가야 한다는 진리, 성령이 충만해야 한다는 부르심, 세계복음화의 사명, 이것들이 제 안에 제대로 각인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거의 99.999퍼센트, 사실상 100퍼센트가 빨리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거나, 꿈속에서 가져온 헤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결단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이름을 정말 불러야겠다. 왜 그러합니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싸움이라고 한다면,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잊지 않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그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그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독일에 보낸 자녀와 무너진 모래성
이번 주에는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독일에 어떤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반나절 정도 마음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무엇인가는 하고 있는데 마음은 비어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차를 몰고 바깥을 돌아다니며 마음을 식혔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자꾸 허함이 밀려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그 자녀를 유럽 땅에 보내면서 마음속으로 미리 그려 둔 그림이 있었습니다. 축구로 성공해서 4부에서 3부, 3부에서 2부, 2부에서 1부 리그로 올라가면서 돈도 많이 벌고,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게 되어, 사람들이 와 대단하다 하고 주목할 때 그때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하고 선포하면 얼마나 많은 제자가 세워질 것인가.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 자녀를 키운 부모가 누구냐며 갑자기 우리도 유명해지고, 교회도 따라서 알려지면서 갑작스러운 부흥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런 상상을 했습니다.
그 상상이 어느새 제 안에서 믿음의 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이었습니다. 만일 중간에 부상을 당해서 잠시 끊겼더라면 그 믿음이 거기서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그것이 이어져 오니, 이번에 다시 그 자녀를 보내면서 제 속에서 분명히 보였습니다. 와, 내가 정말 거대한 모래성을 쌓아 놓고 있었구나.
그런데 그 모래성이 제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저는 신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신이라면 그것이 그대로 되었겠지요. 그러나 저는 신이 아닌데, 자신을 신으로 착각한 가운데 왜 이것이 안 되느냐고 매번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전부터 머리로 알고는 있었지만, 자꾸자꾸 깨지고 또 깨지는 단계를 지나오다가, 이번에 정말 적나라하게 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우든, 공부를 하든, 어떤 사업을 하든, 우리 모두 각자 나름의 모래성을 쌓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것이 안 되면 하나님 도대체 살아 계시는 겁니까 하고 묻습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준의 자리에 누가 앉아 있었습니까. 결국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그것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내려놓았습니다. 언제 다시 그 마음이 올라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내려놓았습니다. 저 자녀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선교가 될 것이다, 라는 그림 자체가 결국 다 제 계획 아니었습니까. 그것을 다 하나님께 내던지고, 그가 흥하든 망하든,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에게 가장 완벽한 길을 준비해 두셨을 것이니, 망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든 흥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든, 그 결과는 내가 모른다, 그렇게 다 내려놓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마음속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이번 한 주간 제가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치른 영적 싸움의 배경입니다.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저는 계속 그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인 본문을 꼽으라면 저는 앞으로 언제까지 설교를 하게 될지 모르지만, 늘 같은 자리를 가리킬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 완벽한 상태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바깥에 있던 사단과, 바깥에 있던 온갖 더러운 것, 죄와 죽음이 모두 인간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이고, 들어와서 다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따라 나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큰 착각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것은 나가지 않습니다. 천국 갈 때까지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평생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싸우기 위한 이름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안에 온갖 쓰레기가 다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이름, 잊어버렸을지라도 다시 부를 수 있는 이름, 잊어버린 상태로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이름을 이미 주신 것입니다.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저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저는 예전부터 수많은 간증을 들어 왔습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 유명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나는 사업을 정말 잘했는데, 나는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스타였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를 망가뜨리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런 식의 간증들입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은 어떤 결론에 이르겠습니까. 아 망한 모습이 결국 하나님이 망가뜨려 놓으신 거구나. 저렇게 망가뜨려서 예수를 믿게 하시는 분이구나. 그러면 나는 차라리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매력적인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업도 망가뜨리고 건강도 망가뜨리고 결국 폐인이 되게 하시는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누가 믿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간을 망가뜨리는 존재는 사단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망가뜨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망가뜨리도록 오해하게 만드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바로 사단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인간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아라는 언약을 주신 그 자리에 다시 서야 합니다. 왜 주셨습니까. 잊어버리지 않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잊어버린 한순간이 모든 것을 뒤집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안에 죄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순간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자리에서 사단의 말을 듣게 되었고, 그때부터 안은 사실상 100퍼센트 사단의 말에 장악되어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공간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이 다시 들어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들어와야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불러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그 이름을 불러야 하나님께서 조금이라도 지혜를 주십니다. 그 이름을 불러야 지식을 주십니다. 그 이름을 불러야 하나님과 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이름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자세하게, 얼마나 깊이 부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잊어버렸을지라도 다시 한번 일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성령강림절 이후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성경은 언제든지 창세기 3장 15절을 기준으로 흐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이 모든 흐름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붙들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의 자리에서 살았던 소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살아갔는지에 관한 역사입니다. 반면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운명과 사주와 팔자에 잡혀, 정신 문제, 건강 문제, 육체 문제, 영적인 문제를 끌어안은 채 살아가다가 죽어서 영원한 둘째 사망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구약이 보여 주는 인생의 두 가지 흐름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마침내 여자의 후손을 보내셨습니다. 신약 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그분이 등장하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 14장 26절입니다. 요한복음은 누가 썼습니까. 요한이 썼습니다. 요한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고 기록한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1장부터 21장까지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죽으시기 직전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이 13장부터 17장까지입니다. 무려 다섯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14장, 15장, 16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고별의 말씀입니다.
그 결정적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신 주제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름 아닌 성령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 가장 중요한 말을 남기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죽기 직전에 열두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장황하게, 자세하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깊이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죽는다. 다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나만 있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와야 한다. 그래야 너희에게 진정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내가 지난 삼 년 동안 했던 말, 행한 역사, 보였던 기적, 그리고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을 너희 속에서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이 바로 오늘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간단한 본문 설명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성령강림 후 넷째 주, 지금까지의 흐름 정리
저는 금년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첫째 주부터 오늘 넷째 주까지 매주 주제를 조금씩 달리하면서 이어 왔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성령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이전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라는 이름만 등장하다가, 사도행전부터는 갑자기 성령이라는 단어가 계속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성령에 충만했다, 성령께서 인도하셨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성령이라는 단어가 핵심이 됩니다. 그만큼 성령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성령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은 곧 누가 그 성령을 보내셨는가, 라는 질문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자의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시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공인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늘 세트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성령, 이 셋이 항상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전철이나 기차의 선로가 양쪽 두 줄로 늘 함께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주의 주제는 믿는 자의 육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내면과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람의 내면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며 살펴보았습니다.
세 번째 주의 주제는 성령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오셔야 할 이유였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우울증, 비교, 두려움의 작동을 어떻게 성령께서 다루시는지를 함께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넷째 주의 주제는 성령은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억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증거이시고, 성령은 우리 인간의 육체 안에, 그리고 생각 속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잡아 두고 오늘 본문을 풀어 가겠습니다.
정보의 싸움. 무엇이 먼저 떠오르는가
오늘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엇입니까.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은 어떻게 작동합니까. 어떤 정보가 안으로 들어오고, 그 정보가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그러면 그 정보가 무엇이냐, 이것이 핵심입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사단에게 장악된 이후, 인간의 안으로 들어오는 가장 원초적인 정보는 무엇입니까.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결혼하는 것, 물건을 사고파는 것, 씨를 심고 거두는 것, 집을 짓는 것,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 육체에서 가장 자주 올라오는 생각도 결국 뭘 먹을까, 뭘 입을까, 어떻게 잘까, 그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일주일에 몇 번씩 한 살짜리 아이의 육아, 세 살짜리 아이의 육아, 그리고 여덟 살짜리 아이의 육아를 가까이서 봅니다.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저는 60대까지 살았으니 닳고 닳은 생각으로 살아왔지만, 한 살짜리 아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막 자라기 시작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입에서 하나님 이름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안에서 솟아 나오는 원초적인 것들은 그저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 학원에서 배운 것이 더해집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중에 예수님 이름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학원에서 배우는 것에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모든 정보는 그 자체로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자리도 자동으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정보의 싸움이 됩니다. 어떤 정보가 먼저 떠오를 것인가, 어떤 생각이 먼저 들어올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이것이 싸움이 됩니다.
육체에서는 그 자리가 자연스럽게 세상의 정보로 채워지므로, 적어도 의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이름이 있습니다.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이 이름을 부르면 잠깐이라도, 곧장 행동으로 옮기려는 육체의 생각이 잠시 멈춥니다. 이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그 순간 잠시라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실 말씀을 떠올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고, 내안에교회에서 진행되는 명상을 통하여 그 이름을 조금씩 부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그것은 곧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성령에 대한 흔한 오해
여기서 우리가 짚고 가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저도 수십 년 동안 똑같은 오해 안에 있었습니다.
성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떠올립니까. 불을 떠올립니다. 하늘에서 번쩍번쩍하는 어떤 빛이 와서, 무엇인가 강력하게 임하는 그런 장면을 성령의 임재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마음 안에서 갑자기 뜨거워지는 그 느낌만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안에서 매일같이 뜨거워지는 일만 기다린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폐렴에 걸려 계속 열이 오르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안에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먼저 생각나도록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자리로 인도되도록 기억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할이지, 안에서 무엇이 뒤집어지는 형태로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했던 말, 내가 행한 이적, 내가 풀어 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 그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 내면 다시 거기에 대해 질문하고,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먼저 듣느냐, 그리고 들었던 정보 가운데 어떤 것을 가장 먼저 기억나게 하느냐,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많이 기억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떤 한 구절이 떠올랐다고 해도, 결국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으로 해석되어야만 정상적인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사례
세 번째로 이 부분을 두 사람의 사례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성령강림 이후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참 희한한 인물입니다. 사도행전 2장 이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을 넘어가면서 이전에 들었던 모든 말씀이 비로소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저는 예전에 무협영화를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무협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어떤 책을 주면서 무조건 외우라고 합니다. 제자는 그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외울 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어떤 단계에 이르고,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무협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구결, 그 문구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구결에 따라 행동하니, 비로소 그 의미가 깨달아지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도행전도 정확히 그러한 흐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때 제자들은 들었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그들 안에 들어오시자, 이전에 들었던 모든 말씀이 한꺼번에 기억나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 제자들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또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회심한 사도 바울은 그 다음부터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서신서를 줄줄이 써 내려갑니다. 그가 거기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성령, 성령, 성령입니다. 왜 그러했겠습니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모든 현상을 그 성령 안에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과 제가, 조금이라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 조금이라도 성경이 생각나고, 조금이라도 교회가 기억나고, 조금이라도 말씀이 떠오른다는 그 사실 자체가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겠습니까. 내 안에 성령이 계셔서 지금 이 순간 생각을 주시고, 어떤 모양으로든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번 주에 제 자신을 들여다보며 정말 뾰족하게 느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구나. 둘째,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이 거의 다 과거의 것뿐이구나.
요즘 사모님이 편찮으셔서 휠체어로 모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운동을 시켜 드리고, 오전에는 카페에 함께 앉아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휠체어를 밀고 가면서, 그리고 카페에 마주 앉아서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거의 다 과거 이야기였습니다. 옛날에 어떻게 했다, 그때 누가 어땠다, 그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현재 여기에 있는 이야기를 합시다. 지금 이 환경,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놓고 함께 기도하면서 이야기합시다. 그런데 그렇게 다잡아도 한두 마디만 현실 이야기를 하다가, 세 마디째부터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누구 씹는 이야기, 누구 비판하는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머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그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 아닙니까.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지금 그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 자리이고, 와 커피가 맛있다 하면서 이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 환경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현실을 보며, 거기서 하나님의 계획을 찾고 기도해야 할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옛날에 어땠는데, 누구는 어떻게 했는데, 그 자리만 맴돌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정말 혐오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의 과거를 돌아보니, 나는 현실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과거에만 묶여서 거기에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보였습니다.
사인을 보내던 한 사람
엊그저께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 곁을 지나가는데, 저에게 계속 무엇인가 사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하고 싶다는 신호였습니다. 제 속에서도 저 사람을 지금 만나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인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인은 잠깐 스쳐 지나가고, 저는 다시 제 과거 안에 묶여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순간 또렷이 깨달았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으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상태가 되겠구나. 특히 저처럼 60세를 넘긴 사람은 과거에 갇혀 살기 쉽습니다. 너무 심각한 문제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서 현실로 돌아오자.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만드는 그 흐름을 다시 돌이키자. 제정신을 차리게 하는 이름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 이름입니다.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현실입니다. 현재 보고 있는 것, 현재 다가오고 있는 사건, 현재 펼쳐지고 있는 상황,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그것에서 다음 발걸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이 현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머릿속에서는 끝없이 과거의 주제만 맴돌고 있다면, 지금 만나야 할 사람도 놓치고, 지금 풀어야 할 일도 놓치게 됩니다.
결론.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이름
이번 한 주간 사단은 여러분과 저의 안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것만 기억하도록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때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게 하고, 하나님의 영이 안에 충만히 들어오시어 다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이 꼭 그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는 가라. 성령 충만. 세계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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