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성령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주신다
본문. 로마서 8장 12절부터 17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주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금년에는 성령강림 이후가 스물일곱 주 이상 이어지기에, 계속해서 성령강림 이후를 주제로 말씀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그 흐름의 일곱째 주에 와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주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과연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핵심 키워드는 두려움이냐, 아니면 신뢰냐,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저는 이번 주에도 계속 영적 싸움을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지키는 것이고, 내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지킬 때 가장 결정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잠재되어 있던 생각들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예전에는 그럴 때 어떻게 했습니까. 머리를 흔들거나,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거나, 정 힘들면 여행이라도 가서 그것을 풀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계속 싸우는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계속 고백하고, 선포하고, 저 자신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중독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이어 가면서 예배를 준비하다가, 무엇이 특별했는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저께 목사님들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에 어릴 때부터 중독된 사람들, 곧 마약이나 성적인 중독,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에 빠진 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이러했습니다. 약을 통해서든 훈련을 통해서든, 어떤 사람이 술을 끊었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정말로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어디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본인도 늘 대비해야 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서포터도 계속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술이 단 한 모금, 단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안에 잠들어 있던 이전의 것이 한꺼번에 다 활성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몸 자체가 이전보다 더 심하게 망가진다고 합니다. 끊었다가 도중에 다시 손을 대면 그것이 더 무섭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은 성찬식을 할 때도 포도주를 드시면 안 된다고 합니다. 포도주도 결국 알코올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잔이 들어가면 사람이 그대로 돌변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죽을 때까지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세상의 방법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아, 정말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구나,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는 책을 보거나 제 주변 사람들을 볼 때, 그렇게 장악되어 있던 사람이 끊었다는 간증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계속 그 이름을 고백하니,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그 사람의 육체 속에 거하시게 되고, 그다음부터 그 사람이 실제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분을 볼 때 저는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술을 한 번 권하거나 담배를 한 번 권하면, 다시 똑같이 하게 되는가. 그런데 그분들 안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자리에서부터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나 있는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야 안 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근원적인 마음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만 만들어집니다.
사모님이 토하시던 밤
이번 주에도 저는 사모님 곁에서 간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갑자기 또 토하셨습니다. 저는 자고 있었지만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 속에서 두려움이 곧장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저것이 또 옛날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겨우 2킬로그램 늘었는데 다시 30킬로그램대로 떨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면 저녁마다 또 죽을 끓여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자동으로 돌아갑니다.
예전에는 그 자동으로 돌아가는 생각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그 애초의 자리에서 딱 끊어 버립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계속 끊고 있습니다.
불은 처음에 꺼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이 활성화되어 어떤 결과가 나온 다음에도 물론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시면 내 생각에는 패턴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싹을 틔우려고 할 때, 그 자리에서 이미 예수는 그리스도로 끊어 버리면 그것이 곧장 진화됩니다.
예를 들어 불이 났다고 해 봅시다. 그 자리에서 곧장 소화기로 끄면 쉽게 꺼집니다. 그러나 다 타 버린 다음에는 소방차가 오고 온갖 장비가 다 와도 이미 다 타 버린 뒤입니다.
교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에 있는 것을 빨리빨리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어 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다 힘들어진 다음에야 주일이나 저녁에 나와서 손을 들고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입니까. 다 벌어지고, 다 무너지고 난 다음에야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생각이 커지려고 할 때, 생각이 증폭되려고 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나를 지켜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지킬 수 있는 비밀을 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입니다.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 때 그것과 대화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을 끄듯이 계속 꺼 나가다 보면, 비로소 현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도 저 자신을 보면서, 야, 너 참 잘 싸우고 있다, 그렇게 저 자신이 대견하게 여겨졌습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구절을 꼽으라면 저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주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바깥에 있던 사단, 바깥에 있던 멸망, 바깥에 있던 죽음, 바깥에 있던 두려움, 바깥에 있던 온갖 우환과 질고가 인간 안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들어온 다음부터는 유전자를 통하여 자녀들에게까지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미 안으로 들어와 버렸으니, 그것을 뽑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크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하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하나님께서 물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안일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했으니 다 끝났다. 물론 다 끝났습니다. 그 상태에서 바로 죽으면 정말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무엇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바깥의 사단도 살아 있고, 내 안의 사단도 살아 있습니다. 내 안의 죽음도 그대로 있고, 하나님을 떠난 그 상태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7장 21절부터 23절 말씀처럼, 안에서 온갖 악한 것들이 유전자를 타고 계속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싸우라고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는 것은 두려움뿐입니다
오늘의 키워드로 따져 보면, 우리가 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안에서 계속 나오는 것이 두려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모님이 갑자기 토하시니 제 속에서 곧장 튀어나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이었습니다. 공포였습니다. 저러다 또 살이 빠지는 것 아닌가. 살이 빠지면 다시 빼빼해져서 30킬로그램 밑으로 내려가는 것 아닌가. 그러면 그 모든 것을 내가 또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자동으로 흘러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실려 옵니까.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결국 공포 가운데 갇히게 됩니다. 그러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저 막막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주신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 이름을 자꾸자꾸 불러야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천사가 나를 보호한다는 사실, 기도가 응답된다는 사실, 내가 하늘나라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이끄신다는 그 사실 자체를 성령께서 안에서 활성화시켜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르느냐 부르지 않느냐이고,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입니다. 많이 싸울수록, 깊이 있게 싸울수록, 하나님께서 이미 성령으로 우리 안에 다 주신 말씀 자체가 활성화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로마서 8장 12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기 전에 성경 전체를 개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으로 시작됩니다. 구약 성경 전체는 그 약속을 믿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른 사람들이 응답받고 모든 축복을 회복해 간 길과, 그 길을 걷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약속대로 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다 이루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저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거하실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가 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부터 쭉 보면,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제자들 각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고, 그렇게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로마서는 왜 쓰였는가
오늘 본문은 로마서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여러 경로를 거쳐 로마까지 흘러갔고, 그렇게 로마에 성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많아진 그 자리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무엇인지, 왜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시는지, 그리고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어떤 두려움이 밀려오는지, 이것을 조직적으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 로마서이고, 로마서는 1장부터 16장까지 이어집니다.
두려움이라는 관점에서 본 로마서의 구조
오늘 두려움이라는 측면에서 로마서를 보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는 너희는 원래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라는 선포입니다.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장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붙잡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5장, 6장, 7장을 지나 오늘 본문 8장에 이릅니다. 8장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여태까지 두려움 가운데 살아왔지만, 이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면 너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양자의 영을 주셔서, 그 안에 신뢰하는 마음, 평안한 마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가
오늘 본문을 보기 전에 먼저 이것을 살펴봅시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 따라, 나는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떤 관계였습니까. 오늘날로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검사를 대하는 것 같은 관계. 직장 상사를 대하는 것 같은 관계. 고용주를 대하는 것 같은 관계. 사채업자를 대하는 것 같은 관계. 곧 주종관계이고, 계약 관계이며, 평생 묶여 있는 관계, 두려움 가운데 놓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자녀가 되었다면 어마어마한 신분과 권세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계속 고백하고 선포하며, 안에서 생각이 들어와 확장되려는 것을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어야만, 안에 계신 성령께서 더 활성화되시고, 성경에 있는 말씀이 내 삶에서 계속 성취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먼저 부르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영과 양자의 영
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내 속에 원초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 속에 있는 것이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쉽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두려움의 영이란 무엇입니까. 두려움의 귀신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영이라고 하면 점잖게 들립니다. 그러나 쉬운 말로 하면 귀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 있고, 존재하며, 성격을 가지고 있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그 목적을 붙들고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어 계속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비되는 것이 있습니다. 양자의 영입니다. 양자의 영이란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있는 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과 영의 싸움입니다.
카드 추심업자, 제가 만난 가장 무서운 사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무섭게 느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저는 직장 생활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기억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카드 추심업자였습니다. 그것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어떤 계기로 제가 카드를 쓰게 되었는데, 아버지 명의의 카드였습니다. 그런데 돈을 갚지 못하니, 저에게 전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저희 아버지에게 전화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이틀 전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전화하고, 한 시간 뒤에 또 전화하고, 또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가 옵니다. 결국 아버지가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도대체 저 카드 회사에서 매일 나한테 전화가 오는데, 나는 도저히 감당을 못 하겠다.
저희 아버지는 평생 남에게 빚을 지고 살아 본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당해 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아버지를 공격하니, 그 전화가 다시 저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 속에 무엇이 옵니까. 엄청난 스트레스 정도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추심 업체가 저에게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느껴졌습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빚은 나중에 갚았습니다.
매일 이자만 갚던 그분
그런데 제가 유사한 분을 또 만났습니다. 어떤 분이 사업을 오래 하셨는데 늘 고민이 있어 보였습니다. 어느 순간 대화를 나누게 되어 물었습니다. 도대체 고민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카드를 너무 많이 썼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갚고 있느냐고 물으니, 매일 이자만 갚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느냐 물으니, 벌써 몇 년째라고 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느냐 물으니, 일은 하고 있지만 그 일에서 나오는 돈으로 이자를 갚는데 그것이 모자라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새벽에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담을 하며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파산 신청을 합시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무섭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카드 업체도 무섭지만, 만약 자기가 파산 신청을 하면, 매일 전화하던 그 추심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해코지할 것만 같아서 그것이 더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을 설득했습니다. 한 주, 두 주, 세 주가 걸렸습니다. 설득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양반은 결국 신용회복 절차를 밟으러 가지 못하셨습니다. 마음속의 공포가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
제가 왜 이 이야기를 길게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있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로 이런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조폭 대하듯 대하거나, 연체된 카드의 추심업자 대하듯 대하거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검사를 대하듯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교회를 한 번 안 나갔다. 예배를 제대로 못 드렸다. 기도를 제대로 못 했다. 봉사를 제대로 못 했다. 목사님이나 교우들과의 관계에서 섭섭하게 했다. 그러면 기도하러 갈 때 하나님이 나를 치실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 줍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그런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두려운 마음에서 드리는 것이며, 안 드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 같은 마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신뢰의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배경입니다.
이집트 선교사 친구의 연구
이번 주에 어떤 영상을 만들려다가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 친구 가운데 이집트에 가서 몇십 년 동안 선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냥 선교만 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를 정말 제대로 연구해야겠다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영국에 가서 이슬람교를 가르치는 학자들이 있는 대학원에서 여러 인터뷰를 하며, 교리적으로 이러이러한 오류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정리해 왔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요청했습니다. 네가 여태까지 연구한 것을 나에게 좀 보내 달라. 그러니 흔쾌히 다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그 파일들을 쭉 살펴보며 영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왜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합니까. 공포 때문입니다. 안 하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종교 생활을 하든 하지 않든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려움 가운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붙잡혀 있는 로마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는 너희가 원래 그런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8장에 와서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는 이제 살아가는 가운데 두려움의 영, 곧 두려움의 귀신에게 죽을 때까지 장악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너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이다.
양자의 영이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하나님을 찾게 되는 그 자리, 곧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가장 밑바탕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전자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두려움의 영, 그 관계는 비즈니스 관계입니다. 돈으로 묶여 있는 관계입니다. 저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결국 돈 때문이고, 돈을 많이 주면 일을 잘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돈에 매여 그저 딱 붙들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다릅니다. 양자란 무엇입니까. 혈육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하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무엇을 망가뜨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신뢰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기에, 야, 네가 잘못했구나, 용서한다, 그런 관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녀와 아버지 사이의 유전자가 뭉개지거나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모든 삶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그런 관계로 형성되어 있으니, 너희 속에 있는 두려움의 영과 싸우라. 내 속에서 두려움을 속삭이는 그 생각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깨뜨려 달라고 하며 싸우라. 이것이 오늘 8장의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먼저 인정해야 할 것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녀라는 측면보다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 곧 두려움을 기본으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어린이집에서부터 몸에 밴 주종관계
교회에 오시는 분들을 보면 어릴 때부터 온 분도 있고, 청년 때부터 온 분도 있고, 장년이 되어서 온 분도 있습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를 보면 이렇습니다. 요즘에는 한 살만 되어도 다 어린이집에 갑니다. 심지어 6개월만 되어도 곧장 어린이집에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아버지와 어머니 품에서 마음껏 응석 부리며 보살핌 받는 시간이 아주 짧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서 무엇을 배웁니까. 눈치를 배웁니다. 아, 조금만 울어야지. 크게 울면 저분이 싫어할 거야.
이것이 무슨 관계입니까. 주종관계입니다. 눈치만 발달하고, 저 사람의 기분을 맞춰야 하고, 나는 없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장 밑바탕에 깔립니다.
그런 상태로 교회에 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말하는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라는 것이 도무지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이미 그렇게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에서 세우시는 관계는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항상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극단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중간의 과정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내가 평생 기도를 안 했다. 헌금도 안 했다. 목사님하고 수도 없이 싸웠다. 교우들하고도 수도 없이 부딪혔다. 그렇게 살았어도 나는 천국에 갑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내가 괴롭다는 것입니다. 자녀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자체도 모르고 살다가, 죽어서 그냥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보다는, 어차피 이 세상에서 그저 살아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다 주어진 것이 있고, 누릴 것이 있는데, 그것을 누리면서 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혼자 살다 가면 모르지만,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넘겨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계속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이번 주에도 저는 이렇게 결단했습니다. 종으로서의 두려움이 계속 밀려올 것이지만, 나는 계속 자녀로 죽을 것이다.
제가 마지막 결론을 내리며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속에서 정말 자유롭습니다.
어떻게 보면 원래 그렇게 살아왔고, 자유로운 가운데 이 말씀을 준비하니, 아 저 목사님은 원래 저렇게 살았으니 저런 말씀을 하시겠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속에서 더 깊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함께 마지막으로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그 이름을 계속 고백하니, 제 속에서 더 깊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저 자신을 봅니다. 그래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들
그리고 예전에는 저 자신 안에 나이 든 꼰대 아버지로서 자녀에 대한 기대가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속으로는 감추고 싶었지만, 그것이 마음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과도 계속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자꾸 마음이 널널해지고 있고, 그러다 또 그 옛 모습이 드러나면 다시 싸우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보며 참 재미있게 여기고 있습니다.
결론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누림이 내 바깥의 현장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우리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신뢰 가운데 모든 것의 배경이 되고 기초가 되며 완성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계속 마음에 심고,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두려움의 영과 싸우겠습니다. 그 싸움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축복과 권세가 더욱더 회복되고, 더욱더 밝히 증거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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