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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교회 주일 말씀 2026.07.19.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성령 충만은 감정 폭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주일말씀 —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

성령 충만은 감정 폭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본문. 에베소서 5장 18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여덟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 충만은 감정 폭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성령강림 이후를 스물일곱 주까지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일곱 주 동안 우리가 붙들어 온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성령은 누구시며, 내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지난 일곱 주간, 우리가 확인해 온 것

첫째 주에는 성령이 누구신가를 확인했습니다. 성령강림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완벽한 증거입니다. 성령은 어디선가 뚝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요청하시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공인하시며 보내신 영이십니다.

둘째 주에는 그분이 어디 계신가를 확인했습니다. 믿는 자의 육체 안에 계십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이 몸 안에 들어오신 분입니다.

셋째 주에는 왜 반드시 안에 오셔야만 했는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안에서 벌어지고, 혼자 있을 때 가장 격렬해지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에는 그분이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첫 번째를 확인했습니다. 내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다섯째 주에는 두 번째를 확인했습니다. 내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내 판단이 절대 옳다고 우기는 그 자리에서 다시 보게 하십니다.

여섯째 주에는 세 번째를 확인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일곱째 주에는 네 번째를 확인했습니다.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채권자처럼 대하던 그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바꾸십니다.

그러면 오늘 여덟째 주는 어디입니까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기억나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두려움을 걷어 내신다면, 왜 나에게는 그것이 늘 그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오늘 그 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지난 일곱 주와 별개의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일곱 주 동안 확인한 그 모든 사역이, 지금 내 안에서 얼마나 가득 차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 정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안에 계신 것과, 그 성령께서 지금 이 순간 내 생각을 붙들고 계신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계신 것은 신분의 문제이고, 작동하는 것은 충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분은 흔들리지 않는데 삶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지난 일곱 주간의 결론이자 적용입니다. 어쩌면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부터 벼르고 벼른 주제가 오늘입니다.

다만 성령 충만에 관한 이야기가 워낙 방대하기에, 금년에는 개괄적으로 잠깐 설명하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개인의 영적 싸움입니다.

이렇게 함께 말씀을 듣는 시간은 딱 한 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모든 생활은 다 바깥의 개인 생활이고, 가정생활이고, 직장생활입니다. 그 시간에 내 마음을 어떻게 지키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고, 내안에교회는 바로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보면 기독교인이 그 당사자인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그것이 언제 벌어집니까. 예배드릴 때가 아니라 다 개인 생활 가운데서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바깥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저는 다른 사람이 보든 보지 않든 계속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제가 살기 위해서 제 내면에서 하고 있습니다.

쇼츠라는 함정

이번 주에 제가 가장 많이 영적 싸움을 한 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일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용량이 꽉 차 버립니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 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습니다. 야, 너 이제 쉬어야지. 유튜브 봐. 쇼츠 재미있잖아.

그래서 머리를 식히려고 잠깐 쇼츠를 봅니다. 낮에는 정신이 산만하니 두세 개 보다가 그냥 끝납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밤에는 대책이 서지 않습니다.

밤에 잠자려고 눕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잠이 안 오지 하다가, 할 수 없이 유튜브를 봐야겠다 합니다.

제가 보는 쇼츠 가운데 하나가 먹방입니다. 구독자가 백만이 넘는 분인데, 한 끼에 130만 원, 140만 원짜리를 드십니다.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렇게 드십니다. 저는 만 원짜리 먹으면서 그것을 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래도 다른 것이 또 나오고 또 나오다 보면 30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됩니다. 눈만 쫙 뜨고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자야겠다 하며 다시 눕습니다. 그런데 금방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 영상들이 다시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야, 저 사람은 백 몇십만 원짜리를 먹는데 너는 뭘 먹냐. 어떤 사람은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데 너는 차도 없잖아. 이것이 계속 밀려옵니다. 그러면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아, 잠이 안 오네 하며 다시 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됩니다. 어느 때는 10시 반에 누웠다가 1시 반까지 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다음부터 제가 영적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야, 이 유튜브, 그중에서도 쇼츠가 정말 무섭구나.

구조를 보십시오. 용량이 꽉 찼을 때, 아 쉬어야겠다 하는 그 자리에 속삭임이 옵니다. 야, 너 머리 식힐 게 없잖아. 잠깐만.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제가 머리를 쉬어야 하는데, 그 쉼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머리를 더 지치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부터 계속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속에서 갑자기 야, 또 쉬어야 하니까 잠깐 쇼츠 봐, 라고 할 때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또 속삭입니다. 야, 그거 불러 봐야 소용없잖아. 잠깐 또 봐. 재미있잖아. 그러면 저는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왜 그 자리에서 불렀겠습니까. 제 생각이 확장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난 몇 주간 살펴본 것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넷째 주에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주에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쇼츠가 30분, 한 시간 이어지는 그 시간에는 말씀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인도하심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안 계셔서가 아닙니다. 계신데 작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오늘 말씀드릴 성령 충만이 무너져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계속 싸우고 있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생각이 나는 대로 무조건 행동했는데, 이제는 그 생각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원자 안의 전자까지 들여다보듯이 더 깊이, 더 자세히 살펴보며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보게 하는 이름

요즘 간병 역할을 하다 보니 바깥으로 자주 나갑니다. 그러면 저는 이 현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 하나님이 이 자연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만드셨구나. 밤에 달을 보면 이 우주는 무한대의 세계입니다. 수학으로 따지면 끝없이 올라가는 세계입니다. 아, 이것이 무한대의 세계구나 하면서 자연을 보고,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이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게 됩니다.

그런데 곁에 함께 계신 분은 조금 걷다 보면 속에서 옛날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 누가 뭐 했는데. 옛날에 어땠는데. 그것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며 지킵니다. 우리가 지금 봐야 할 것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 원한이 있는 사람, 과거의 기억만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비로소 현재가 됩니다.

우리는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과거에 잠겨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살기 위해 계속 그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시는가와 상관없이, 저는 제가 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서 있는 자리도 가르치려는 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증인으로 서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저는 죽을 때까지 항상 같은 자리를 말씀드릴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완전히 망가졌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답이었습니다.

그 답이 쭉 이어져 왔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지고 시대가 복잡해져도 하나님이 주신 답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제로 이 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답을 주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평안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영원히 사는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상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타락 이전 인간은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원래의 충만입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서 그 영이 떠나셨고, 그 빈자리에 사단이 들어왔고, 죽음이 들어왔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7장 21절부터 23절 말씀처럼, 안에서 음란과 살인과 도적질과 사람을 해하는 온갖 것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그것이 기본값이 되어 버렸습니다.

곧 인간의 근본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던 자리가, 다른 것으로 충만한 자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안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성령 충만을 말할 때 이 사실을 반드시 먼저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기기 위해, 물리치기 위해, 잠시라도 뒤로 밀어내기 위해 주신 이름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

구약 성경은 그 이름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은 범위에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부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 기록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야곱이 나오고, 요셉이 나오고, 모세가 나오고, 쭉 이어져 다윗이 나옵니다. 그분들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부모를 잘 만났다,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안에 있는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오늘의 주제처럼 얼마나 깊이, 얼마나 자세하게, 얼마나 지속적으로 누렸느냐에 따라 그들의 인생이 달라졌다는 기록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충만의 개념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이미 정도의 차이 안에 살았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누림의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은 약속에 머무릅니다. 결국 신약에서 그 약속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분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이 그 결론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주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고, 여러분과 저의 모든 신앙생활의 시작부터 끝은 예수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깊이 있게 아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사도행전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육체로 계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영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인간의 안에서 복음서에 보여진 것과 똑같은 활동과 능력과 지혜와 지식으로 일하시는 그 영이, 이 안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성령이십니다.

이것이 첫째 주부터 우리가 붙들어 온 그 자리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떨어진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가 충만하다는 뜻이지, 다른 무엇이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목이 그리스도의 충만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안에 들어오셔서 제자들에게 각기 다양하게 역사하셨고, 그 제자들이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바울과 에베소, 3년의 가르침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고 로마까지 가는 여정이 사도행전 13장부터 28장까지 이어집니다.

그 가운데 3차 전도여행 때 주로 사역한 지역이 에베소였습니다. 다른 지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은 잠깐 머물다 떠났는데, 에베소에서는 무려 3년을 가르쳤습니다.

그것도 초창기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원숙한 시기에 3년을 가르친 것입니다. 시기로 보면 대략 주후 52년부터 55년 사이입니다.

10년 뒤, 로마 감옥에서 들려온 소식

그리고 8년에서 10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이고 정말 발전된 도시였습니다. 이방 사람들과 교류가 많고,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며, 무역을 하는 가운데 수많은 다양한 신들이 들어와 섬겨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3년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압니다.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신 것도 압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삶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안 계셔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성령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이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에게 바울이 무엇이라고 씁니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가 다른 서신과 다른 점

에베소서는 다른 서신과 결이 다릅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대부분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씁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1장부터 3장까지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미 받은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이제 무엇을 말합니까. 너희가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나오고, 6장에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곧 지난 일곱 주간 우리가 확인한 그 모든 것을 이미 아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것을 실제로 누리라고 말하는 편지가 에베소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정확히 같습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먼저 나의 위치를 확인합시다

성령 충만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나의 위치에 대한 전제 조건을 달아야 합니다. 지난 여섯째 주와 일곱째 주에 확인한 그 자리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마귀야 가라.

나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죄와 죽음과 사망과 사단에게 사로잡혀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는데, 그 이름을 불러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원, 그 수많은 것들이 다 끝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죄를 짓는다면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가장 밑바탕은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조금 잘못했다고 해서 자녀라는 신분이 좌우됩니까. 좌우되지 않습니다. 자녀는 아무리 밖에서 엉망으로 지내다가도 저녁이 되면 자기 집으로 옵니다. 거기가 내가 있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분과 충만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의 결정적인 구분이 나옵니다.

신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충만은 흔들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나는 절대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죽을 때에도 그 영이 함께 가십니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것이고, 지난 일곱 주 내내 확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 지금 이 순간 내 생각을 붙들고 계신가,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자꾸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 아니냐. 자녀답게 살아라. 네가 실수하고 죄를 지어도 회개는 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는 상관없다.

그런데 동시에 내 속에서 또 다른 소리가 말합니다. 아니야. 네 행동 때문에 너는 오늘 죄를 지었으니 지옥 간다. 이것이 싸움입니다.

어느 쪽 목소리가 지금 내 안을 채우고 있느냐, 그것이 성령 충만의 문제입니다. 신분이 없어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은 이미 있는데, 그 신분에 따라 살아가는 자리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의 원래 뜻

성령 충만을 원어로 보면 무엇이 나옵니까. 무엇인가가 꽉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기름 넣을 때 만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꽉 차 있는 상태, 그것이 원어로 본 성령 충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성령 충만은 지속적으로 계속 채워져야 하는 것이지, 한 번 채웠다고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무언가를 넣어 주어야 하는 상태이고, 계속 누군가가 집어넣어야 하는 상태입니다.

꽉 찼다가 또 떨어지고, 꽉 찼다가 또 떨어지고, 언제든지 요동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확인하십시오. 자녀 신분은 요동치지 않습니다. 충만은 요동칩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 충만을 명령형으로 말한 것입니다. 신분은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만은 명령해야 합니다. 계속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안은 비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다른 것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이미 차 있는 것을 밀어내며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싸움인 것입니다.

에베소라는 도시, 제가 직접 가 보니

제가 실제로 에베소에 가 보았습니다. 지금은 튀르키예, 옛날에 터키라고 부르던 나라의 서쪽에 있고, 항구도시입니다.

가 보니 로마에 있던 모든 양식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고 지금도 보존되어 있습니다. 화장실도 있고, 그 화장실도 멋있고, 목욕탕도 있고, 없는 것 없이 다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7월에 갔었습니다.

항구도시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전 세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오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사상과 습관과 생활과 종교가 다 함께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 생활을 하다가 에베소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바깥 생활을 그대로 닮은 채 그대로 들어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안으로도 밖으로도 다 엉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깥에서 안으로 계속 다른 것이 채워져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우리나라의 성령 충만 오해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신앙이 들어온 순서를 보십시오. 기독교가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무속적인 것이 오래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위에 불교와 유교가 겹쳐졌으며, 기독교는 가장 늦게 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내면 구조를 보면, 기독교는 맨 위에 얇게 얹혀 있고 그 밑에는 무속적인 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교회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에 대해 우리는 어떤 오해를 하고 있습니까. 어마어마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 그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새벽 기도에서 크게 방언으로 기도하시는 모습, 기도원 원장님이 엄청나게 세게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 아 저분이 성령 충만하시구나 합니다. 그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분들이 성령 충만의 모델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 일곱 주 동안 우리가 확인한 성령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넷째 주에 확인했습니다. 성령은 안에서 무엇이 뜨거워지게 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떠오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다섯째 주에 확인했습니다. 성령은 벼락처럼 임하시는 분이 아니라 잔잔히 다시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의 충만도 감정 폭발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제목이 여기서 나옵니다. 성령 충만은 감정 폭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시니, 그분이 가득 차신 상태란 곧 그리스도가 가득 차신 상태입니다.

바울은 받으라고 했지만, 방법은 남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가르치고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말했지, 어떤 과정으로 받는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안에교회의 방식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할지를 지금부터 적용해 보겠습니다.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성령 충만을 받든, 성령의 인도를 받든,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 고백하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주에 확인한 그대로입니다. 성령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 이름을 부르는 자리가 곧 성령께서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고, 그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면 생각은 가만히 있다가 증식됩니다.

스마트폰 앞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증식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머리가 아픕니다. 쉬는 시간이 조금 생겼습니다. 그러면 당장 무엇을 봅니까. 스마트폰을 봅니다.

제가 길거리를 다니면서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가입니다. 대부분 유튜브를 보고 계십니다. 지금 저분에게 뜨고 있는 썸네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유심히 봅니다.

요즘 매일 간병인 역할을 하니 사모님을 모시고 한강에 나갑니다. 중간 지점에 앉으면 사람들이 많이 앉아 계십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계십니다.

어저께 보니 60대쯤 되신 분이 어떤 정치인 관련 영상을 계속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화면에는 계속 그 인물이 뜹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튜브는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검색했는지, 얼마나 보았는지를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동으로 뜨고, 또 계속 누르게 됩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합니다. 저분의 안은 지금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속삭임의 실체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시간 여유가 조금 생깁니다. 그러면 생각이 옵니다. 야, 또 머리 좀 식힐 겸 스마트폰 봐 봐.

스마트폰을 딱 보면 글이 아닙니다. 영상입니다. 보면 벌써 딱 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 저거 봐. 재미있잖아. 하나 봅니다. 야, 이것 가지고는 양이 안 차잖아. 또 봅니다. 그리고 또 봅니다. 야, 더 재미있는 게 있어.

계속 제 속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자아는 그래, 그래, 그래 하며 따라갑니다. 30분,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난 다음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우울하고, 답답하고, 짜증나고, 분노와 두려움이 그대로 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해소하려고 또 봅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두 시간 동안 제 안은 무엇으로 충만했습니까.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으로 만땅이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이 커지려는 그 자리에서

그러면 내안에교회는 성령 충만을 어떻게 적용합니까.

생각이 커지려고 할 때입니다. 야 너 유튜브 보면 재미있어, 한 개 봐 봐, 더 봐 봐, 이렇게 생각이 자꾸 확장되려고 할 때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생각이 확장되려고 할 때, 증식되려고 할 때, 내가 주체하지 못하려고 할 때, 그 자리에서 끊는 이름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끊어지면 생각이 더 이상 연결되지 않습니다. 끊어지면 거기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내 현재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불꽃일 때 꺼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어떠합니까. 저도 옛날에 그랬습니다. 생각이 막 커지는 그것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다 퍼져서 다 엉망이 되고 다 망가진 다음에야, 아이고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그때서야 말하는 것입니다.

작은 불꽃일 때 끄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 불꽃이 커져 버리면 건물 여러 층이 다 타 버립니다. 그 상황이 된 다음에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른다면, 이미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은 것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지켜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생각입니다. 생각이 증식되려고 하는 그 자리입니다.


결론. 여덟 주간의 도달점

지난 일곱 주 동안 우리는 성령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는가를 확인해 왔습니다. 그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이시고, 내 육체 안에 계시며, 내 생각 속에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두려움 대신 신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여덟째 주,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모으면 이것입니다.

내안에교회에서 성령 충만이란, 예수는 그리스도를 많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성령께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내가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얼마나 깊이, 얼마나 자세하게, 얼마나 자주, 얼마나 지속적으로 부르느냐가 곧 충만의 정도입니다.

감정이 폭발해야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가득 차야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여러분과 제가 그 이름을 자꾸 부르면 달라집니다. 정말 달라집니다.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다르게 보이면 다르게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누리시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일곱 주 동안 성령께서 누구시며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게 하셨고, 오늘 그 모든 것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열어 주셔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의 높이와 깊이를 더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삶의 수많은 습관과 사상과 중독되어 있는 생각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서 왕좌를 차지하고 왕 노릇 하고 있는 그 생각들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불러 확장될 때 끊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가득 채우시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번 한 주간 동안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나의 삶에, 나의 문제에, 나의 가정생활에, 나의 직장생활에 더 깊이 누리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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