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성령은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교통을 이루십니다
부제. 성령은 계셔서 끝나지 않고 나를 하나님과 통하게 하십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은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교통을 이루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아홉 주를 한 줄씩 이으면
오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한 줄씩 이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이 어디에 서 있는지 한눈에 보입니다.
첫째 주, 성령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십니다. 둘째 주, 성령은 믿는 자 안에 거하십니다. 셋째 주, 성령은 제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십니다. 넷째 주, 성령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다섯째 주, 성령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여섯째 주, 성령은 종의 두려움을 자녀의 확신으로 바꾸십니다. 일곱째 주,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십니다. 여덟째 주, 성령은 하나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홉째 주, 성령은 흔들리지 않는 소속으로 나를 붙드십니다.
그런데 이 아홉 주를 가만히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방향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에게로 내려오는 한 방향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계시고, 말씀하시고, 증언하시고, 인치십니다. 전부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그동안 저는 받는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그 방향이 양쪽으로 열립니다
오늘 열째 주의 주제인 교통은 바로 그 방향을 양방향으로 여는 자리입니다.
지난주까지는 성령이 내 안에 확정되어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신다는 것과, 그 계신 분과 내가 실제로 주고받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도장이 찍혀 있는 것과, 그 도장 찍힌 관계 안에서 대화가 오가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이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교통을 이루십니다. 교통이라는 말이 조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말로 바꾸면 소통입니다. 곧 대화이고, 주고받음입니다. 지난 아홉 주가 성령이 나에게 오셔서 확정되기까지의 이야기였다면, 오늘은 그 확정된 성령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실제로 통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이번 주에 제가 어떻게 싸웠는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들 앞에서 실수하던 날
이번 주에 목사님들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교단 헌법에 관한 용어를 이야기하다가 제가 잘못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작은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제 속에서 무언가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야, 너 다 안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잘난 체하다가 그 앞에서 틀렸느냐.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어릴 때부터 나는 다 알고 있다는 축이 하나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틀리거나 남보다 뒤처지는 순간이 오면, 그 축이 건드려지면서 저 자신을 향한 미움과 짜증이 확 올라오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심하게 올라오는 자리가 있습니다. 같은 업계, 곧 목회자의 세계입니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경쟁이 있고 질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뒤처지거나 실수하면 자기혐오와 짜증이 유독 심해집니다. 이것은 아마 목회자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어느 분야, 어느 업계에 계신 분이든 같은 업종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 마음이 가장 강하게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는 시간이 짧아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 이후 사흘 동안 저 자신을 자책하며 싸웠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은 며칠이 아니라 몇 주를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흘로 짧아졌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속에서 야 너 왜 그 앞에서 틀렸느냐고 밀려올 때, 저는 그 자리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그 축이 건드려져 미움이 올라오려는 그 순간, 생각이 커지기 전에 끊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 자신을 지키며, 아 나도 참 잘 싸우고 있구나 하고 저 자신을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저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구절을 교통, 곧 소통이라는 눈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과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소통했습니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아버지와 자녀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지음받은 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선악과를 먹은 그 사건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끊어진 그 자리에 다른 존재가 들어왔습니다. 사단입니다. 소통의 상대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그 뒤로 사람은 누구와 대화합니까. 마가복음 7장 21절 말씀처럼, 안에서 올라오는 온갖 악한 생각들과 대화합니다. 음란한 생각과 대화하고, 미움과 대화하고, 두려움과 대화합니다. 그리고 대화한 그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소통의 길을 다시 여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 곧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면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소통이 다시 열립니다. 어떻게 열립니까. 그 이름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자녀 안에 성령이 들어와 거하시므로, 비로소 하나님과 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통의 상대가 다시 하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붙들 순서는 분명합니다. 이름을 불러 자녀가 되고, 자녀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성령이 나를 하나님과 통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입니다. 이 본문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간단히 훑어보겠습니다.
오순절에서 바울까지
성령이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오셨습니다. 그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사도행전 13장부터 등장하는 인물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세 번의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는 교회를 세웠고, 2차 전도여행에서는 유럽으로 복음을 넘겼으며, 3차 전도여행에서는 이미 세운 교회를 양육하고 굳게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 2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그리고 두 종류의 사역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대략 주후 50년에서 52년 사이에 고린도에 이르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는 두 항구를 낀 상업 도시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원리를 보십시오. 짧게 머문 곳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기초만 세우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래 머문 곳에서는 그 기초 위에 성령과 교회와 성숙과 거룩과 공동체와 영적 전쟁까지 가르쳐, 성도를 성숙한 제자로 세웠습니다. 고린도는 약 1년 반을 양육한 곳입니다. 뒤이은 3차 전도여행, 대략 주후 53년에서 57년 사이에는 에베소에 3년을 머물렀습니다. 이 두 사역은 시기가 서로 다릅니다.
고린도후서는 어떻게 쓰였는가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 교회는 우상과 방언과 부활 문제로 더 혼란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주인공인 바울 자신의 사도직이 도리어 공격받았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사도가 맞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편지를 디도의 손에 들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디도가 돌아와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잠잠해지고 회개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바로 그 기쁨 가운데, 3차 전도여행 중 마케도니아에서, 대략 주후 57년경에 쓴 것이 오늘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세 부분
고린도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쉽습니다. 1장부터 7장까지는 바울의 마음입니다. 화해와 위로, 곧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8장부터 9장까지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연보와 나눔, 곧 사랑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10장부터 13장까지는 바울의 사도권입니다. 참된 사도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맨 마지막, 결론인 13장에서 바울은 축복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축복합니까. 성령의 능력도 아니고 성령의 은사도 아니라, 성령의 교통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자리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교통이라는 말의 뜻
오늘의 열쇠 단어는 교통입니다. 교통은 교류이고 소통입니다. 성경은 같은 실체를 여러 구절에서 조금씩 다른 말로 담아냅니다.
이 말의 원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그 기본 뜻은 함께 참여하다, 함께 나누다, 공동체, 교제, 동역, 공유입니다. 한마디로 핵심은 공동 참여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 본문에만 나오는 특별한 말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 약 열아홉 번 쓰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는 초대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 생활로 나오고, 로마서 15장 26절에서는 가난한 성도를 위한 연보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보여 주신 교통
이 교통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가장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저 같은 공간에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함께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질문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삶을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 이후에는 그 관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안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소통에는 먼저 전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통에는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카카오톡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와 대화를 하려면, 먼저 친구로 초대되어 등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등록도 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기반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통은 지난주까지의 자녀 신분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교통은 손님과 집주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자녀가 매일 대화하며 함께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고, 성령은 그 자녀가 아버지와 끊어지지 않고 살아가도록 교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왜 바울은 마지막에 교통을 축복했는가
여기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왜 편지의 맨 마지막에서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교통을 축복했겠습니까.
고린도전서가 교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편지였다면, 고린도후서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깨졌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큰 능력이나 화려한 은사가 아니라, 다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교통으로 축복한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 안에서 매일 함께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먼저 나의 위치를 부릅니다
적용에 앞서, 먼저 나의 위치를 확인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지금 내가 가장 먼저 불러야 할 이름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고백이 나의 위치이고, 오늘 모든 적용의 기초입니다. 카카오톡으로 치면, 이 고백으로 나는 이미 하나님과 친구로 등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기초 위에서 소통을 적용합니다
이 기초 위에서 오늘 소통을 적용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미 자녀가 되었으니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나는 소통할 수 있는데도 잘 소통하지 못합니까.
나에게도 소통의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저 자신을 들여다보니 이유가 보였습니다. 저에게는 어릴 적 아버지의 상과 어머니의 상이 겹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척 엄하셨고, 어머니는 꼭 필요한 요점만 짧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두 모습이 겹치니, 저는 하나님도 무섭고 멀고 엄숙한 분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는 공식적이고 진지한 이야기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날씨가 어땠는지, 오늘 무엇이 즐거웠는지, 그런 자잘한 일상의 대화가 잘 안 됩니다. 저는 사람과도 그렇습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렵고, 카카오톡으로 시시콜콜한 안부를 주고받는 것이 서툽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소통도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이 소통의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성령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카카오톡으로 보면 분명합니다. 친구로 등록은 되어 있는데 1년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는 맞습니다. 그러나 교통은 없습니다. 반대로 매일 대화하고, 사진도 보내고, 힘든 일을 상의하다 보면 관계가 점점 깊어집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계신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령은 나의 즐거움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고, 나의 슬픔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큰일만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작은 일까지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하나님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한번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섭고 멀고 엄숙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하듯이 말입니다. 그 소통이 열릴 때, 흔들리지 않는 소속이 비로소 살아 있는 대화가 됩니다.
결론. 계셔서 끝나지 않고, 통하게 하십니다
지난 아홉 주 동안 우리는 성령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는지 확인해 왔습니다. 그 마지막 자리, 아홉째 주에서 우리는 성령이 나를 흔들리지 않는 소속으로 붙드신다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붙드심이 차가운 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나를 붙드신 그 자리에서, 나를 하나님과 통하게 하십니다. 계셔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통으로 살아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끄시고, 말씀하시고, 나를 하나님께로 연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번 한 주간, 그 성령을 따라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교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지난 아홉 주 동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고 계시고 우리를 자녀로 붙드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고, 오늘은 그 성령께서 우리를 아버지와 통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무섭고 멀고 엄숙한 분으로만 대하여, 작은 일상을 나누지 못하고 소통이 끊어져 있었음을 봅니다. 성령께서 그 막힌 자리를 열어 주옵소서.
이번 한 주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이미 자녀 된 그 자리에서, 기쁨도 슬픔도 아버지께 조잘조잘 아뢰며, 은혜와 사랑 안에서 끊어지지 않고 소통하는 한 주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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