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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교회 주일말씀 — 성령강림 후 열한째 주일 2026.08.09. 성령의 인도는 내 욕망을 따라가지 않게 하십니다

주일말씀 — 성령강림 후 열한째 주일 2026.08.09.

성령의 인도는 내 욕망을 따라가지 않게 하십니다

부제. 예수님을 따르던 그 자리가 오늘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리가 됩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18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한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인도는 내 욕망을 따라가지 않게 하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내안에교회는 금년에 성령강림절 이후가 스물일곱 주까지 이어지기에, 계속해서 성령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 오후 예배나 따로 성경을 배울 수 있는 모임 시간이 마땅치 않기에, 이렇게 주일 예배를 맞이하여 성령을 주제로 한 주씩 이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한편으로는 집중하실 필요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지난 흐름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인도라는 키워드로,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지난주에 성령의 교통을 다루었습니다. 교통을 오늘날 말로 하면 소통이고, 서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에 소통하려고 참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대화가 어려운 사람이 대화를 연습하다

제 곁에 있는 배우자인 박효숙 사모는 아주 오래전부터 대화를 참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20대 초반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하나님을 그냥 살갑게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무 거부 반응 없이 계속 대화하는 모습을 제가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대화하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사실 지금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려고 하면 멀뚱한 제 모습을 봅니다. 무슨 말을 하지. 한마디 하고 나면 그다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희가 살던 시대에는 어릴 때 부모님과 단답형으로만 대화했습니다. 특히 저희 어머니는 완벽하고 고집이 세셔서, 한번 생각하면 그 생각을 끝까지 집요하게 붙드는 분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제 밑바탕에 늘 깔려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 필요한 말만 하라. 남자는 묵직하게 앉아 있어야 한다. 어릴 때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좀 살가운 분이라, 막내인 저를 데리고 어머니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남자가 채신머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그냥 제 안에 딱 박혀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할 때 좀 살갑게 하고 싶은데, 한마디 하려고 하면 갑자기 속에서 압력이 옵니다. 밥 먹었느냐, 오늘 기분은 어떠냐, 날씨가 어떠냐, 옷이 예쁘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남자가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하는 마음이 딱 몰려옵니다. 어머니의 그 모습에 제가 잡혀 있는 것입니다.

100가지 질문으로 소통을 연습하다

그래서 이번 주에 어쨌든 대화를 해 보았습니다. 사실 지금은 많이 진전되어서, 이건 어떻습니까, 저건 어떤가요 하며 계속 이어 갑니다. 이번 주에는 이것을 습관으로 만들 필요가 있어서, 선을 그어 제가 하나님께 질문하고 그 답을 헤아려 보는 식으로, 한 100가지 질문을 만들어 쭉 훈련했습니다.

또 제가 정해진 시간에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도 물어보았습니다. 한 네 살짜리 아이에게 밥 먹었느냐 하니 먹었다고 합니다. 어떤 밥 먹었느냐, 맛은 어떠냐, 버리지는 않았느냐. 그렇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자꾸 물어보니, 아이가 답을 합니다.

여기서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대화를 해야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에서는 여전히 하고 싶지 않고, 어머니의 그 모습이 올라와 남자가 그런 것을 물어보느냐 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에 그 싸움을 싸웠습니다.

40도의 더위 속에서도

이번 주에 싸움이 정말 어려웠던 것이 또 있습니다. 서울이 40도까지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바깥에 나가면 사우나 같은 열기가 확 몰려옵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때에도,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했습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세상에서 무엇을 배우려 할 때, 다 따져 보고 나서 배우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늦습니다. 다 따져 보는 사이에 배우려던 동기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무엇이든 가장 쉽게 배우는 길은, 우직하게 일단 하다가 모르면 그때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과, 안 하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첫째도 예수는 그리스도고 끝도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하면서 속에서 질문이 나오고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오면, 그때 질문하면 됩니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무언가 하다가 힘들어하기에, 그때도 예수는 그리스도를 하니 아이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기분이 나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일을 하다가, 신경 쓰이는 일을 하다가도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별수 없습니다. 그것을 해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제 인생이 여기서 바뀌었고,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이것임을 보았습니다.

학문의 정점에 오른 선배 목사님과의 통화

이번 주에 어떤 일로 멀리 계신 선배 목사님과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학문적으로 그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정점까지 간 분입니다. 누구나 인정하고, 전 세계에서 그 분야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다 인정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을 대화하면서 제 속에 물음표가 있었습니다. 저분은 학문의 정점까지 가셨는데, 과연 성경에서 가장 핵심을 무엇이라고 보실까. 자꾸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그분께는 어쩌면 우스운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런 것을 질문하느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같은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믿는 것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왜 이 구절이 핵심입니까

우리 인간에게 모든 문제가 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 때문에, 바깥에 있던 사단, 바깥에 있던 불신앙, 바깥에 있던 자기가 신이 되려는 마음, 바깥에 있던 질병, 바깥에 있던 우상, 바깥에 있던 영원한 저주가 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온 가장 큰 정체가 바로 사단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신분이 바뀌고, 소속이 바뀌고, 안에 있는 것이 차근차근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죽을 때까지 다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야 벗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라진 자리

원래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이미 영을 주시고, 여기를 잘 지키라 하셨고, 세상에 살아가는 방향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 곧 말씀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이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이 뱀을 통하여 가장 좋은 모습으로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동산의 실과를 다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가 여기서 다 먹지 말라 하셨다고만 답하고 끝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자기 생각을 들여 다시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괜찮을 것이다, 하는 자기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기 생각으로 결정하고, 그대로 행동한 뒤에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보십시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까지는 그래도 하와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사단이 들어온 다음부터 인간에게서 하나님이 빠지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습니까.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의를 내고, 자기 권세를 내면서 세상을 정복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창세기 4장에 살인이 벌어지고, 6장에 타락한 시대가 오고, 11장에 왕들이 나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세상을 정복합니다. 그것이 구약을 지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주신 이름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가 가진 것은 한계가 있으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임하는 이름을 주겠다 하시고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인 예수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약으로 따지면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고 지식을 주시고 방법과 방향을 주시는 가운데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개인마다 편차가 있습니다. 깨달은 수준이 다 다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 이름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희한하게도 하나님께서 지혜와 지식으로 이끌어 가시는 방법이 드러났습니다. 그 대열에 여러분과 제가 서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18절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는 도시가 아니라 행정 구역입니다

갈라디아는 어떤 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행정 구역의 이름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전라북도, 서울시, 경기도처럼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바울이 첫 전도여행 때 이 갈라디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 안에 루스드라도 있고 이고니온도 있고 더베도 있고 비시디아 안디옥도 있습니다. 그 지역을 다 묶어 갈라디아라 합니다.

잠깐 머물고 떠난 교회

그때 바울은 젊었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고, 몇 달 있다가 빠져나갔습니다. 에베소나 고린도에는 오래 머물렀습니다. 에베소는 적어도 3년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은 박해와 반대가 워낙 심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하다가 쫓겨나다시피 하여 겨우 몇 주에서 몇 달 정도 머물고 다른 곳으로 떠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복음을 조금 아는 정도에서 바울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그래도 교인은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유대인들, 특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유대인들이 그 갈라디아 지방으로 온 것입니다. 그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고 토론하고 신앙 이야기, 간증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은 맞다. 그런데 너희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만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하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

왜 이 말이 먹혔습니까. 갈라디아 지방 사람들은 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신앙의 모델로 삼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색이 있습니다. 머리 모양도 다르고, 무엇보다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와서, 너희도 이제부터 율법을 지켜야 하고, 피째 먹으면 안 되고, 이것저것 먹어도 안 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자꾸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되, 거기에 다른 것을 더해야 한다고 자꾸 말한 것입니다.

헷갈림이 베드로에게까지

그러니 아직 복음의 기초만 알던 갈라디아 교회들이 그다음을 몰라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헷갈림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안디옥까지, 심지어 베드로까지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그 헷갈림을 바로잡기 위해 쓴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특히 1장부터 4장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야, 너희들 다 끝났다.

저를 따라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하나님을 만나는 길, 축복받는 길, 천국 가는 길, 기도 응답받는 길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왜 그분이 그리스도가 되셨는가에 대한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거기에 이것저것 더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바로잡은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5장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데,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된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인도라는 말의 뜻

오늘의 열쇠 단어는 인도입니다. 오늘날 말로 풀면 방향을 준다, 지도한다, 모델을 삼는다, 안내한다, 동행한다, 어쩌면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따르라에서 인도한다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제자들은 네, 알겠습니다 하고 따랐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그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으로 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때 용어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성령님은 인도한다고 나옵니다. 따르라와 인도한다는 다릅니다. 그러면 제자가 해야 할 일도 달라집니다. 인도받겠습니다, 이것입니다.

따르는 데에도 전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실 때, 제자가 따르려면 선결 조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스승으로, 주로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 저분의 말씀을 최우선에 두고 따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먹고 자고 무엇을 하든, 예수님이 어떤 행동을 하시고 어떤 표정을 지으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에 자기가 집중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따라갈 때 늘 속에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자기가 살아온 습관과 체질과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자꾸 부딪힙니다. 자기 생각이 먼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내 속에서 자꾸 더 따르겠다, 우선에 두겠다 하는 그 자체가 훈련의 과정이었고, 그것이 제자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인도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로 연결합시다. 오늘 성령은 인도한다고 표현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인도받겠습니다, 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이것이 바탕입니다. 가장 먼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계속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이 안에 성령으로 오신 사실도 믿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무슨 인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물어보는 습관

그 이름을 고백하며 살아가다 보면, 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여러분이 살아가는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계속 일하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생각이 있고, 주관이 있고, 여러 정보를 통한 판단이 있어 그대로 행동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번 더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은 이 자리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기를 원하시는가. 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정상인지 아닌지, 한 번쯤 물어보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있는 사람은 한 번쯤이지만, 자꾸 습관이 되면 물어보는 습관이 생깁니다.

물어본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다는 전제이고, 그 영이 나보다 더 지혜로우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고 물어보고 답을 헤아리고, 다시 물어보고 헤아리는 가운데 어느 방향으로 갈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난 열 주의 흐름 위에 오늘이 있습니다

여태까지 성령강림절 이후로 열 주까지 이어 왔습니다. 처음에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이고, 그분이 제자들의 육체 안에 오셨으며, 이 안에 오실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문제가 이 안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자녀의 신분을 주셔서, 두려움을 가진 종이 아니라 자유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법으로 하나님께서 다 보증하셨다고 했고, 지난주에는 교통한다, 곧 대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어떤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 살아갈 때는 늘 새로운 환경,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사건 앞에서 계속 무언가를 선택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것이 오늘의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여태까지는 네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 성령이 네 안에 거하시니, 성령께 물어보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라. 다만 네 안에서 계속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세계 복음화. 세계 복음화.

인도의 최종 목적지는 세계 복음화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인도입니다. 성령이 나를 인도하신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목표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인도하시는 최종 목적은 어디입니까. 사도행전 1장 8절, 세계 복음화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먼저 마음속에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도 세계 복음화, 목표도 세계 복음화, 방향도 세계 복음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여태까지 살아온 것을 보면, 내 이름을 내고 내 능력을 발휘해 세상에 한번 드러내는 것이 그냥 자동으로 목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늘 세계 복음화가 내 인생의 목표이고 가치이고 방향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가장 밑바탕에 중심으로 잡아 두어야 합니다. 방향이 있어야 우리가 그리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한 준비, 개인화와 전문화

이 방향으로 가기 위해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첫째는 개인화입니다. 세계 복음화를 향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데, 그 가운데 여러분과 제가 각자 개인으로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려면, 먼저 개인이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복음화는 가장 간단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있게, 얼마나 자세하게, 얼마나 내면 깊이 부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표현하면 단순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부르느냐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부르면 생각이 나고, 부르면 짜증이 나고, 부르면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 찾아보면 됩니다. 부르면서 무언가 떠오르면 정상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문화입니다. 세상은 전문화 시대입니다. 더구나 AI가 발전하면서 초개인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상품을 팔 때도 전체를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그 개인만을 위해 상세 페이지를 따로 만들고, 타깃을 정해 방향을 정합니다. 그러니 무서운 시대이자 개인이 초개인으로 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볼 때나 제 자녀를 볼 때 늘 기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더 전문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더 세분화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 내가 가진 재능을 자꾸 찾고 세분해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도 결국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를 때 됩니다.

시행착오를 당연히 여기십시오

세계 복음화와 전문화로 나아가는 가운데 속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것입니다. 쉽게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닐 때 충돌이 없었습니까. 싸움도 있고, 배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따라갔습니다. 따라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갈등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행착오를 당연히 여겨야 합니다. 시행착오는 실패가 아니고, 실패했다고 죄인이 되는 것도 아니며, 죄인이라 지옥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나아가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거쳐 가는 과정입니다.

세계 복음화를 향해, 전문화를 향해 나아갈 때 어느 때는 실패할 수도 있고, 어쩌면 실패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과 어긋나는 일도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 부르며 나아가십시오. 실패를 당연히 여기고, 실수를 당연히 여기고, 무너진 것을 당연히 여기고, 다시 대화하고 또 대화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주, 함께 걸으며

이번 주에는 공교롭게 저희가 함께 여행도 하고, 내안에교회 캠프라는 이름으로 모이기도 합니다. 함께 가면서 교류도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대화하고, 충돌이 생기면 또 함께 대화해 봅니다. 그 충돌에서 내 생각만 붙잡을 것이 아니라, 그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어떻게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지 헤아리는 가운데, 이번 한 주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과 정보를 통하여 행동하고 결정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보와 판단에는 늘 인간의 경험이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이끄시며 보존하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혼까지 지으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늘 열어 주셔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때로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실수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회복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섯째, 다섯 번째 질문의 세계 복음화, 개인화, 전문화, 시행착오를 당연히 여기라는 적용을 살리되, 시행착오가 실패나 정죄가 아니라는 대목은 자기 정죄로 흐르지 않도록 회복으로 마무리를 잡았습니다. 이번 주 캠프 안내도 자연스럽게 녹였습니다.

일곱째, 마침표와 물음표 외 어떠한 부호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대화와 인용은 모두 산문 흐름 안으로 흡수시켰습니다. 다듬어 보강한 부분은 볼드체로 표시했습니다.

여덟째, 배우자 성함이 전사 과정에서 박수 사모로 표기되어 있어 그대로 두었습니다. 정확한 표기가 다르면 알려 주시면 바로잡겠습니다. 또한 한네 살, 여덟 살 등 아이들의 나이도 전사본 그대로 두었으니 확인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추가로 다듬고 싶으신 방향이 있으시면 알려 주십시오. 앞서 정리해 드린 11주 설교 자료본과 이번 실제 전사본을 하나로 합쳐 완성본을 만들거나, 대화 훈련 부분만 유튜브 짧은 영상용으로 다시 쓰거나, 지난번들처럼 영어 번역으로도 작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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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매번 시작만 하고 멈출까? —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결심이 오래가지 않는 진짜 이유 또 멈췄다 재현은 이번에도 3일째였습니다. 첫날은 됐습니다. 둘째 날도 됐습니다. 셋째 날 저녁, 회식이 있었습니다. 늦게 들어왔습니다. 피곤했습니다. 그날 안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습니다. "어제 끊겼으니까 오늘은 다시 시작이네." "역시 나는 꾸준함이 없어." "의지가 약한 건가." 재현은 이 패턴을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다이어트. 운동. 독서. 매번 시작했고, 매번 같은 지점에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정말 의지 문제였습니까?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지가 약하다." 그런데 정확하게 봅시다. 재현이 밥을 먹는 것은 의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상황이 행동을 만듭니다. 재현이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은 의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알림이 오면 봅니다. 습관적으로 잠금을 풉니다. 조건이 행동을 만듭니다. 인간은 기억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늘 해야지"*라고 기억해서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는데 를 *"기억날 때 해야지"*로 설계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억이 약한 날, 피곤한 날, 바쁜 날. 안 됩니다. 기억은 상황보다 약합니다. 문제는 의지가 약한 게 아닙니다. 구조가 없는 겁니다. 감정 기반 실행의 한계 수진을 봅시다. 기분 좋은 저녁에는 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는데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생각이 멈춥니다. "오늘은 잘 됐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로 바쁩니다. 상사 카톡이 와 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완전히 잊었습니다. 왜입니까? 기분 좋은 저녁에 됐던 건 수진의 감정 상태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아침에 안 됐던 건 감정 상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기준이면 ...

관찰4 도움이 되었다고 참인 것은 아니다

도움이 되었다고 참인 것은 아니다 앞 단계에서는 자동 결론이 행동을 대신 결정하기 전에 짧은 틈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때 자연스러운 반론이 생깁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다른 말을 하면 생각이 잠깐 멈추는 것 아닌가?” 그럴 수 있습니다. 관찰1부터 세 번 미뤄 온 이 비교를, 오늘 약속대로 정면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첫 답은 회피가 아니라 인정입니다. “잠깐 멈춰”, “아직 모른다”, “지금 할 일 하나”, “먼저 확인하자” — 이런 문장도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중단점으로 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단계에서는 어떤 문장이 가장 강한지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두 질문을 구분합니다. 문장이 순간적으로 어떤 기능을 했는가? 문장이 주장하는 내용은 실제로 참인가? 1. 같은 기능을 해도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문장 주된 의미 잠깐 멈춰 진행 중인 흐름을 중단하라는 명령 아직 모른다 현재 정보만으로 결론 내릴 수 없다는 확인 지금 할 일 하나 행동의 범위를 한 가지로 좁히는 지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존재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 네 문장은 모두 생각의 흐름을 잠시 바꾸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지금 할 일 하나”는 행동에 관한 말이고, “아직 모른다”는 정보의 한계를 확인하는 말이며, “예수는 그리스도”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주장입니다. 순간적 기능이 비슷하다고 의미까지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한 줄로 미리 말해 두자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인류의 근본 문제를 풀러 온 구원자를 뜻하는 말이고, 이 문장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주장입니다. 그 뜻과 근거를 제대로 검토하는 것은 관찰5의 몫입니다. 여기서는 “이건 기능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주장이다”라는 위치만 잡아 둡니다. 2. 도움이 됐다는 경험이 진리를 증명하지 않는다 시험을 앞두고 “나는 반드시 합격한다”고 말한 뒤 마음이 안정되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장은 일정한 기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됐다는 사실...

[내안에교회 초급훈련 A1]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당신은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 느낌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나는 전이랑 완전히 똑같은데?" "이건 괜히 시간 낭비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멈춥니다. 그런데 멈추기 전에 질문 하나만 더 해봅시다. 당신에게 정말 아무 변화도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즉각적인 체감이 없었다" 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결론을 너무 빨리 내린 걸까요? 느낌은 변화를 측정하는 가장 늦은 지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효과가 있다면 즉시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구조적인 변화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운동을 시작한 첫날에 근육이 눈에 보입니까? 당신이 투자를 시작한 첫날에 수익이 확정됩니까? 당신이 약을 한 번 먹었다고 병이 바로 낫습니까? 대부분의 변화는 아주 미세한 틈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자동으로 흘러가던 흐름이 1초라도 느려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하지 않네. 그렇다면 무효야."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체감이 없으면 그 즉시 실패 판정을 내려버립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끝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급함입니다. 그래서 기록을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해봅시다. 당신은 논리적인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실험해봅시다.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확신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측정하자는 겁니다. 7일 기록 실험 방법 오늘부터 7일 동안, 당신은 하루에 딱 1분만 투자합니다. 매일 이 세 가지를 기록하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당신이 "예수는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