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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교회]주일예배 2026.08.23.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주일말씀 — 성령강림 후 열셋째 주일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부제. 거룩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계속 자라 가는 것입니다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부터 14절


서론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셋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키워드와 문맥의 균형을 잡겠습니다

여태까지 열세 주 동안 성령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말씀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하다가 그 단어가 놓인 성경의 문맥을 놓친 때도 있었고, 반대로 문맥을 너무 붙들다가 키워드를 흐린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심을 잘 잡아 보겠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문맥보다는 거룩이라는 단어 자체를 중심에 두고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전하기 전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성령에 대해 한번쯤 꼭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계속 성령만 이야기하니 어떤 때는 따분하고 지루하실 수도 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잘 버티며 함께 예배하시니 제가 도리어 힘을 얻어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저는 계속 영적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이겼다거나 24시간 완벽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지, 매 순간 잘잘못을 따져 맞다 틀리다 판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나 중고등학교 때는 하나하나 따져 잘못한 것에만 집중하며, 인상을 찌푸린 채 참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큰 흐름으로 보면 우리는 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신분은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이미 옮겨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저는 실패하거나 실수할 때마다, 아 내 신분은 여기고 나는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지 하며 다시 방향을 찾습니다.

그런데 방향을 잡는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수시로 순간순간 그 이름을 어떻게 붙잡느냐입니다. 영적 싸움의 가장 기본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숨쉬는 것 아닙니까. 숨이 기본이 되어야 먹고 마시고 다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생명이고 숨입니다. 이것을 통해 다른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 이 기본이 안 된 채로 무엇을 안다고 하면 가장 기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아무 일도 없는 조용한 한 주

이번 주에 한 가지 생각이 왔습니다. 평상시 제 삶은 이벤트 중심이었습니다. 교회당 중심으로 주일과 행사를 중요하게 여기며, 늘 무언가를 많이 준비하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그리고 지난 2, 3주부터 계속 조용한 것입니다. 아무 일도 오지 않았습니다. 뭔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건이 오지 않고, 조용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니, 낙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거 도대체 뭐지, 응답이 빵빵 터지면 기분이 좋은데 그런 것이 안 나오니 이게 뭔가 했습니다.

그러나 또 기도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아무런 증거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이 고백을 하는 가운데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누리고 있자, 이렇게 붙들었습니다.

돌아보니 저에게는 오래된 습관이 있었습니다. 뭔가 센세이셔널한 것이 오고 큰 이벤트가 와야 하나님의 응답이다, 내 주변에서 기적 같은 큰일이 일어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런 신념입니다. 그 습관이 조용한 2, 3주 동안 도리어 정리되고 새롭게 세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가 보고 느낀 감각

한편으로 요즘 제가 돌보던 사모님이 조금 나아지셔서, 늘 다니던 큰 병원에 오랜만에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가 보니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습니다. 축구 선수도 매일 하다가 한 달을 쉬면 감각이 확 떨어지지 않습니까. 저도 한두 달 다니다가 한두 달 못 가니, 다시 갔을 때 어색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현장에 있어야 제 자신이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것을, 꼭 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언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를 속에서 계속 부르는 저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번 주 성경 전체를 볼 때 창세기 3장 15절을 어떻게 보았는가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볼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상황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부터 쭉 이어진 그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

모든 인간은, 저를 포함해서, 이 속에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있어, 속에서 나오는 것은 마가복음 7장 21절부터 23절처럼 이상한 것뿐입니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5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인하여 우리가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신분은 이미 달라졌지만, 체질과 습관과 사상은 하루아침에 다 바뀌지 않고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단지 두렵고 부끄러워 숨고 몸을 가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죽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하나님 자체를 생각할 수도 없는 가운데,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영혼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아담과 하와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이름을 붙잡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죽었다가 양자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다음부터는 신분이 변화된 것이지, 행동이나 유전자가 그 자리에서 다 바뀐 것이 아닙니다. 신분만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가 긴 여정, 곧 하나님의 영이 안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어 가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구약 전체가 이 흐름입니다

그 과정이 쭉 이어져,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뭔가 잘난 사람이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 그 여자의 후손을 붙잡고 양자가 되어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왜 저 사람이 늘 실수만 하느냐 싶지만, 그것은 윤리의 기준일 뿐, 신분은 이미 변화되었고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 가운데 변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이 응답받는 이야기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달라지느냐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여자의 후손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구약의 흐름이고, 그 흐름이 지금 여러분과 저에게도 흘러오고 있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부터 14절입니다. 성경은 파편처럼 흩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오순절에서 바울까지

그 기본이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이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쭉 이어지다가 신약에서 드디어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 이름이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던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거기서 끝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시던 모든 일을 똑같이 하시는데, 다만 다른 것은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셨기에 만나기 어려웠지만,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제자들 안에 들어오신 다음부터,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보살피시던 그 일을 성령이 그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어져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울입니다.

데살로니가라는 항구도시

바울이 사도행전 17장에서 이른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그리스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직접 가 보았고, 이 말씀을 준비하며 그때 찍은 사진도 다시 보았습니다. 항구도시는 늘 특색이 있습니다. 우상숭배가 심하고, 다양한 사람이 드나드니 음란한 문화도 심합니다.

거기서 복음을 전했는데 반대가 워낙 심해, 딱 3주밖에 머물지 못하고 피신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때는 대략 주후 49년에서 50년입니다.

전서를 쓰고, 다시 후서를 쓴 이유

그러고 1년쯤 지나,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곳의 핍박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깥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만 붙드는 성도들을 계속 핍박한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런데 다시 1년쯤 지나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 좋은 말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미 다시 오셨다. 예전에 오신다더니 이미 왔다. 그러니 너희는 뭐 하느냐, 어서 그분을 찾아 나서야지. 그러니 성도들이 헷갈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신다더니 이미 왔다니, 그럼 우리는 무엇인가.

그 헷갈리는 믿음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쓴 것이 데살로니가후서이고, 오늘 본문 2장 1절부터 14절입니다. 그 내용은, 재림은 누가 왔다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려면 전제 조건과 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징조를 자세히 설명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 오늘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오늘은 문맥을 잠시 옆에 두고, 거룩이라는 단어 자체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도 이미 가지고 있던 것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쓸 때, 그 성도들에게는 이미 기본 조건이 있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처럼 우리가 사단의 자녀였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거역되며, 결국 질병과 재앙과 죽음과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날 유일한 이름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 마음에 영접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함께 예배하며 세계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도 성령이 계셨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 안에 계신 성령이나 여러분과 제 안에 계신 성령이나 똑같은 분입니다.

1주부터 12주까지, 성령이 하신 일

그 위에서 지난 열두 주를 잠깐 되짚어 보겠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뒤 아버지께 구하여 보내신 분으로,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이분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바깥에서 온 정체불명의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출처가 분명한 분입니다.

이분은 내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계속 증거하시고, 여태까지 들은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며, 한번 들어오신 뒤 나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신 것을 인치신 증거로 오셨고, 가만히 계시지 않고 자꾸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것이 열두 주까지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우리뿐 아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도 기본으로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제자인 바울이 이미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거룩의 원래 뜻, 하기아조

그런데 오늘은 거기에 하나를 더 얹어 거룩을 말합니다. 거룩은 원어로 하기아조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소속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풀어 보면, 하나님께 소속된다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 어떤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속에는 두 가지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상태에서 이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나를 이끄실 수 있는 거대한 존재가 이쪽으로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280번, 그리고 거룩한 성도

거룩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 약 280번 나옵니다. 지난주에 다룬 열매가 성경에 한두 번밖에 나오지 않은 것과 견주면 아주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단어에 가장 많이 붙는 말이 성도입니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성도, 이렇게 거룩과 성도를 계속 이어 붙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이 단어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거룩한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신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실 뿐 아니라, 원어의 뜻대로 나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구별하여 계속 어딘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끄심을 우리가 거룩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열매와 거룩은 다릅니다

이것을 두 가지로 더 쉽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와 열매라는 단어는 다릅니다.

먼저 왜 바울이 거룩을 늘 성도와 붙였는가입니다. 예수님은 3년 반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함께 다니시며 함께 먹고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저마다 자기 생각과 사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기 경험으로 쌓인 것이라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생각의 범위 자체가 이 세상만이 아니라 천국까지 보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을 보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과 계속 다니면서 생각이 자꾸 넓어지고, 이 세상에 갇힌 생각과 사단에게 잡힌 생각이 자꾸 깨져 갔습니다. 그 깨어지는 과정을 지나 결국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제자로 세워졌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바울은 거룩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레이트 바인, 230년을 이어 온 한 그루

마지막으로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영국 궁전에 그레이트 바인이라는 이름의 포도나무가 있습니다. 1768년에 심었습니다. 보통 포도나무 한 그루는 한 해에 15에서 30킬로그램 정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그레이트 바인은 왜 유명해졌습니까. 평균 272킬로그램, 가장 많았던 2001년 가을에는 383킬로그램을 맺었습니다. 보통 나무의 열 배가 넘습니다. 제가 다 조사해 보았는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1768년에 심었으니 지금까지 약 250년이 흘렀는데도 그 나무가 여전히 살아서 계속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왜 드리느냐 하면, 지난주에 다룬 열매는 그 포도나무의 한 송이 한 송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거룩은 무엇입니까. 그 나무가 계속 자라고 살아가도록, 농부가 거름을 주고 가지를 치고 관리하는 그 모든 과정, 그리하여 그 나무에서 열매가 끊이지 않고 영속적으로 맺히게 하는 그 전체 과정을 거룩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폭넓은 거룩의 개념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어려운 단어보다 먼저, 지금 나는 누구인가

어려운 단어가 등장하고 모르는 말이 나오면 잠깐 머리가 멍해집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잠깐 옆에 두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누구냐, 지금 내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현실이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상담책을 수도 없이 보는데, 거기서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 있느냐입니다. 문제를 가진 사람은 항상 과거에, 상처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어디에 앉아 있느냐를 계속 묻습니다.

그러니 다 잊어버려도 이것만은 붙드십시오. 지금 나는 누구인가. 함께 고백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예수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고, 내가 가는 방향은 세계 복음화입니다.

모든 것의 바탕은 그 이름입니다

이전 열두 주가 흘러오며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말씀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고, 오늘 거룩하게 하신다고 이어졌습니다. 그 모든 것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다시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레이트 바인이 383킬로그램을 맺고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농부가 땅에 심어 뿌리가 살아 있으니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열매를 맺게 하시든, 충만하게 하시든, 거룩하게 하시든, 그 용어는 몰라도 됩니다. 가장 기본은 예수는 그리스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다 보면, 바울이 왜 그 말을 했는지 총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안 하고 용어만 붙들면 조금 있다 지나가 버립니다.

거룩을 완벽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들으면,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일수록 딱 오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 거룩해야 한다니 나는 죄짓지 말아야겠네, 완벽하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늘 충만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지 못하면 나는 저주받고 지옥 가는 것 아닌가.

목사가 설교 중에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고 말하면, 곧바로 이런 생각이 옵니다. 아 나는 거룩하지 않은데, 나는 계속 죄짓는데, 나는 중독된 것이 많은데. 사실 중독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쇼츠 중독, 게임 중독뿐 아니라 저마다 남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중독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을 다시 바로 세워야 합니다. 거룩해야 한다는 말이 딱 올 때, 그것은 지금 완벽해져라, 완전해져라, 모든 것을 다 끊어라, 24시간 충만해 있어라, 끊임없이 회개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룩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나를 죄 안 짓는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십 년 저를 붙들던 문제

제가 오늘 이것을 크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붙잡혀 있던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완벽에 아주 찌들어 하나하나 따지는 분이었고, 저 또한 수학을 좋아해 하나하나 따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라는 단어만 오면 나는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에 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단어가 왔을 때 곧바로 너는 죄인이다, 너는 못난 놈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치워라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단의 말입니다. 특히 혼자 있을 때 그 생각이 옵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올 때,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십시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이번 한 주간, 자유로우십시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중독을 안 끊어도 괜찮다거나 죄지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과 씨름하다 무너져 자기를 정죄하는 그 자리에서, 먼저 붙들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름으로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한 주간 자유로우십시오. 예수는 그리스도를 자꾸 부르면, 하나님께서 나를 총체적으로 붙드시고,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이 다 거룩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며, 이번 한 주간도 응답받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가며 세상의 수많은 정보를 만나고, 이미 알고 있던 신앙의 수많은 교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하여 거룩함에 대해,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해 다시금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그 유일한 이름을 부르면서, 오늘 들은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새로운 사상이 되고, 새로운 습관이 되고, 새로운 신념 체계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잘못된 거짓 사상에 잡혀 있는 것도,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새롭게 치유되고 갱신되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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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었다고 참인 것은 아니다 앞 단계에서는 자동 결론이 행동을 대신 결정하기 전에 짧은 틈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때 자연스러운 반론이 생깁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다른 말을 하면 생각이 잠깐 멈추는 것 아닌가?” 그럴 수 있습니다. 관찰1부터 세 번 미뤄 온 이 비교를, 오늘 약속대로 정면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첫 답은 회피가 아니라 인정입니다. “잠깐 멈춰”, “아직 모른다”, “지금 할 일 하나”, “먼저 확인하자” — 이런 문장도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중단점으로 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단계에서는 어떤 문장이 가장 강한지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두 질문을 구분합니다. 문장이 순간적으로 어떤 기능을 했는가? 문장이 주장하는 내용은 실제로 참인가? 1. 같은 기능을 해도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문장 주된 의미 잠깐 멈춰 진행 중인 흐름을 중단하라는 명령 아직 모른다 현재 정보만으로 결론 내릴 수 없다는 확인 지금 할 일 하나 행동의 범위를 한 가지로 좁히는 지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존재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 네 문장은 모두 생각의 흐름을 잠시 바꾸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지금 할 일 하나”는 행동에 관한 말이고, “아직 모른다”는 정보의 한계를 확인하는 말이며, “예수는 그리스도”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주장입니다. 순간적 기능이 비슷하다고 의미까지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한 줄로 미리 말해 두자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인류의 근본 문제를 풀러 온 구원자를 뜻하는 말이고, 이 문장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주장입니다. 그 뜻과 근거를 제대로 검토하는 것은 관찰5의 몫입니다. 여기서는 “이건 기능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주장이다”라는 위치만 잡아 둡니다. 2. 도움이 됐다는 경험이 진리를 증명하지 않는다 시험을 앞두고 “나는 반드시 합격한다”고 말한 뒤 마음이 안정되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장은 일정한 기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됐다는 사실...

[내안에교회 초급훈련 A1]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당신은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 느낌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나는 전이랑 완전히 똑같은데?" "이건 괜히 시간 낭비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멈춥니다. 그런데 멈추기 전에 질문 하나만 더 해봅시다. 당신에게 정말 아무 변화도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즉각적인 체감이 없었다" 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결론을 너무 빨리 내린 걸까요? 느낌은 변화를 측정하는 가장 늦은 지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효과가 있다면 즉시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구조적인 변화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운동을 시작한 첫날에 근육이 눈에 보입니까? 당신이 투자를 시작한 첫날에 수익이 확정됩니까? 당신이 약을 한 번 먹었다고 병이 바로 낫습니까? 대부분의 변화는 아주 미세한 틈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자동으로 흘러가던 흐름이 1초라도 느려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하지 않네. 그렇다면 무효야."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체감이 없으면 그 즉시 실패 판정을 내려버립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끝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급함입니다. 그래서 기록을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해봅시다. 당신은 논리적인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실험해봅시다.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확신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측정하자는 겁니다. 7일 기록 실험 방법 오늘부터 7일 동안, 당신은 하루에 딱 1분만 투자합니다. 매일 이 세 가지를 기록하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당신이 "예수는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