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열다섯째 주일
제목 성령은 가족을 보는 눈을 바꾸십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6절부터 21절
저는 오늘 성령은 가족을 보는 눈을 바꾸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다섯째 주간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도움으로, 지금 내안에교회는 성령강림 후 첫째 주부터 열다섯째 주까지 계속 성령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본문 중심으로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지만, 저는 본문을 배경으로 삼아 성령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는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본문에서 벗어나는 일도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열다섯째 주까지 성령에 대해 계속 말했지만, 결국 성령은 어떤 분인가를 전체로 통틀어 보면 이렇습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 하신 모든 활동이,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자꾸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애매모호하게 성령이 계신다고 하는 것보다는, 아 이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끄시고 숨쉬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능력을 행하시고 이루어 주시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적인 관계에서 계속 교류하시던 그 일을, 이 안에 계신 성령도 똑같이 하시는구나. 다만 우리가 스물일곱 주까지 지나야 하기에, 그것을 한 부분씩 나누어 설명하는 것뿐이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서론을 배경으로 하여,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특별히 붙들 것은, 성령이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을 보는 눈을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우리 함께 고백해 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저는 이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소리 내어 하고, 어느 때는 힘들면 그냥 속에서 계속합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또 속에서 합니다.
이번 주 저의 영적 싸움도 결국 사람을 보는 눈의 문제였습니다. 이번 주에 저는 군산에 갔습니다. 제 친구 목사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갑자기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성결교단이었거든요. 그 자리에 가니, 십 년 만에 만난 목사님이 참 많았습니다. 군목 선배도 있었고, 예전에 서울신대를 다닐 때 이 년 동안 자취생활을 함께한 선배도 뵈었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이러시더군요. 와 사십 년 만에 만난 것 같다. 사십 년 만에 만났는데, 늘 마음속으로 최 목사는 도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났습니다. 갑자기 사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또 그 동기 목사가 군산 사람이라, 군산에 있는 목사들 몇 명이 모여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거기에 머물렀을 텐데, 이번에는 제가 계속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군산에서 살았는데도 군산의 영적 상황을 잘 모르는구나.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자꾸 이 지역의 영적 상태를 헤아리려고 참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 날 조사해 보니, 작년에 군산선교역사관이 새로 세워졌더군요. 시에서 돈을 대고, 국가에서 돈을 대고, 군산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서도 돈을 내어 아주 멋있게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저와 사모님이 시간을 내어 가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자꾸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다 보니 이런 마음이 열렸습니다. 이 지역의 영적 상태는 어떨까. 기독교가 처음에 어떻게 이 땅에 들어왔을까. 이렇게 마음의 문이 바깥으로 열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호남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이 군산이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저는 어렸을 때 군산에서 살았으니 그냥 군산 사람인데, 그때뿐 아니라 지금으로 따져도 전국에서 인구 대비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곳이 또 군산이었습니다. 와 정말 신기하다, 군산이 그런 도시였구나 했습니다.
선교역사관에 보니, 1895년에 전킨이라는 선교사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합류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일곱 명이 왔다고 합니다. 그 뒤로 고생하며 세운 교회가 구암교회이고, 또 개복동교회도 군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병원도 세웠습니다. 물론 그 선교사 혼자 세운 것이 아니라, 그는 복음을 전하고, 함께 온 사람들 가운데 의사도 있어 의료를 맡고, 여럿이 힘을 모았습니다.
학교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학교가 남아 있는데, 멜볼딘이라는 여학교가 있었고 지금은 영광여자중고등학교입니다. 그때 제일고등학교도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세워져서, 호남에서부터, 군산에서부터 복음이 쭉 연결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처음에 세워졌던 구암교회가 지금도 있었습니다. 옛날 건물도 있고, 새 건물도 세워졌더군요. 제가 어렸을 때 구암교회라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보면서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니, 전킨 선교사가 보던 성경책과 망원경과 안경과 가방 같은 것이 쭉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시니어 봉사자분들이 오셔서 그 상황을 다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가 쳐다보기만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그분들이 배경을 다 설명해 주시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들어와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고, 정신문화적으로도 참 많은 개혁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이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알게 되었고, 그분들이 지금 천국에 가 계시지만 만약 다시 오신다면, 그때보다 기독교가 얼마나 더 발전했고 정신문화도 발전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로 인해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가 다 영향을 받아, 어쩌면 이 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자리로 가고 있는 것을 보시고 참 뿌듯하시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목사로서 어떻게 하면 이 그리스도를 더 누릴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번 주부터 갑자기 날씨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이 속에서, 제 나이가 되니 몰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꼭 가을만 되면, 찬바람이 나오면 몰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야 너 외롭지. 너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면서 야 인생은 이렇게 덧없는 거야 하면서 쫙 몰려옵니다. 이 찬바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 예수는 그리스도를 계속했습니다. 제 마음이 그쪽으로 더 가지 않도록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영적인 상태입니다.
두 번째 질문.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5절을 어떻게 더 깊이 알게 되었는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단의 자녀가 되어 버렸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혼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못했을 때, 그때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만, 왜 그리스도를 주셨는가, 그 배경을 알아야 그것을 붙잡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주에 제가 이것을 다시 보았습니다. 희한하게도, 선악과를 먹은 뒤 아담의 눈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시니, 저 부인 때문에 그랬다고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며, 눈이 열려 내 아내가 최고라고 했는데, 갑자기 창세기 3장이 되니 저 여자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와는 또 뭐라고 합니까. 뱀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곧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남을 탓하는 눈이 인간의 본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따져 보면, 사람이 자기가 잘못을 하잖아요. 저를 포함해서, 잘못하면 저 사람 때문에, 저 환경 때문에, 저 정치가 때문에, 저 사람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다 남에게 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기는 피해를 안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 눈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4장부터 보면 가인이 동생을 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해, 전혀 다른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 보면, 좋은 땅을 차지할 수 있는데도 먼저 조카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조카를 좋아하고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밑바탕에 무엇이 있느냐. 창세기 3장 15절이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려면, 어떤 상황이 생기더라도 남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 내가 문제다 하고 인식하려면, 먼저 바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 고백을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본성 자체가 변화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문제를 바깥 사람에게 옮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대응할까로 바뀐 상태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 고린도후서 5장 16절부터 21절을 본문으로,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간단히 설명함.
제가 성경을 볼 때 항상 창세기 3장 15절로 해석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오신다는 것이 항상 주제입니다. 그런데 왜 여자의 후손이 와야 하는지는, 항상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이 근거가 됩니다. 왜 와야 합니까. 사단이 이 안에서 나에게 작동하니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온다고 약속하셨고, 구약 성경은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 온다, 온다, 온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창세기 3장 15절부터 그분이 오시기까지 참 깁니다. 왜 깁니까. 거기에는 왕도 오고, 선지자도 오고, 제사장도 오고, 유명한 사람도 옵니다. 열왕기 상하를 보면 왕들이 쭉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멸망합니다. 성전도 있고, 성막도 있고, 수많은 제사와 절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황하게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다 주셨는데도, 왕도 선지자도 제사장도 성전도 제사도 다 있는데도 안 된다는 것을, 리얼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마태복음을 보면 드디어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예수이십니다. 예수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여러분과 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성령이 드디어 이 안에 오셨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함께하시던 그분이 여러분과 제 안에 똑같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 보면, 이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역사하시고 난 다음에 온 세계로 퍼져 가는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이것은 누가 보냈습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왜 보냈습니까.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언제입니까. 주후 50년에서 52년 사이입니다. 그 교회를 세우고 일 년 반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다른 교회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다릅니다. 앉아서 일 년 반 동안, 바울이 가진 신앙의 모든 것을 다 가르쳤으니 얼마나 깊이 알겠습니까. 그것도 주후 50년에서 52년이면 2차 전도여행 때 가르친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이 46년경에 시작했으니, 2차가 50년경입니다. 그 사 년의 기간 동안 바울은 경험이 많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회를 일 년 반 동안 가르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쭉 흘러가다가, 사 년쯤 지났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가 바울이 아니면 도저히 해석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이고 고린도후서입니다. 오늘은 고린도후서인데, 이것은 대략 주후 55년에서 56년 사이에 썼습니다.
오늘 우리가 5장을 봤는데, 고린도후서의 흐름을 보면 바울이 자신을 향한 공격에 답하며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곧 너희가 나에게 그렇게 태클을 거는 것 자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네 번째 질문. 오늘 본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
우선 성경을 볼 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눈을 좀 넓혀 보면, 사도행전은 교회가 넓게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다가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가 쭉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워진 교회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그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를 담은 것입니다. 각 교회의 상황이 그 편지들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도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워진 지 사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니 그 교회는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사 년이 흘렀고, 바울이 일 년 반 동안 가르쳤기 때문에, 신앙의 수준은 여러분과 저보다 더 높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들도 이미 마음속에 결론 내린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이것이 그들의 기반에 다 깔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은 우리보다 더 확실히 결론 내린 사람들일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바울이 가르치던 곳이니까요.
그리고 그들도 성령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령에 대해 열다섯째 주째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도 바울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셨고, 너희 안에 거하시며,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증거하시고, 이 안에 한번 들어오시면 절대 나가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녀 삼으신 것을 인치시는 분이며, 천국에 갈 때까지 함께 가시는 미래의 보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이 안에서 말씀하실 뿐 아니라 인도하시고 생각의 사슬을 끊게 하신다는 것을, 그들도 기초적으로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왜 이 편지를 썼습니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왜 문제가 생겼습니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도 다 바깥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깥에서 살다가 교회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바닷가의 상업 지역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전 세계 사람들이 상업적으로 많이 거래하던 곳이고, 그냥 농사짓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린도에 가 봤는데, 높은 산 위에 어마어마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때 당시 돈이 있고 사업을 더 크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무언가 제사를 드리거나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그곳에 왔습니다. 저 높은 신전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전이 유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른 신전과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사제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섬기는 신이 이 안에 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자기네들이 더 사업을 잘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받든지, 아마 제물 같은 것을 아래에서 사서 짊어지고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 세계 사람들이 옵니다. 돈 있는 사람, 지위 있는 사람이 다 옵니다. 그런 상태에서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온 그 사람들 속에서, 내안에교회가 늘 말하는 그 속삭임이 들어옵니다. 야 바울 떠났어. 바깥을 봐 봐.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돈 가진 사람, 유명한 사람, 지위 있는 사람, 더 큰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 다 대단하잖아. 봐 봐 다 그렇지. 그런데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이 누구야. 바울이잖아. 그런데 바울은 비교가 되잖아. 키도 작고,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결혼도 안 했고, 몸도 왜소하고, 말솜씨도 시원찮은데 뭐가 있어. 이렇게 생각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어떻게 확대됩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바울이 세운 이 교회가 도대체 뭐야, 하면서 생각이 자꾸 다른 쪽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편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야 바울이 뭐가 중요해 다른 사람을 모셔야 돼 하며 바울을 부정하는 쪽으로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자꾸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서로 원수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심각하니까 바울이 쓴 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떤 맥락입니까. 오늘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한 번쯤 들어보셨지요. 말 자체가 얼마나 멋있습니까. 제가 신학대를 다닐 때, 화장실 앞에 늘 성경 구절이 써 있었는데, 그것을 외워야 했기에 딱 보면 거기 써 있었습니다. 야 멋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오늘 내용은 16절부터 21절입니다. 이 맥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롭게 된 사람이야. 그러니 나는 옛날 것을 다 지나 보냈어. 나도 나 자신의 옛날 것을 쳐다보지 않아.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살인에 앞장서던 사람이잖아요. 정상적으로 기독교인에게 바울은 살인자였습니다. 그러니 자기 과거를 생각하면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사람이다. 나도 나 자신의 과거를 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나도 너희의 과거를 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 과거에 있는 것은 다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누리니까. 그러니 너희도 나같이 변화되어라. 그렇게 변화된 가운데, 너희끼리 화목하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맥락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번째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때, 바울이 말하는 새롭다는 것은 조금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저희 동네에 가면 매미 허물 같은 것이 있잖아요. 껍질이 나무에 쫙 붙어 있습니다. 밑에서 애벌레가 올라와 자라다가, 어느 순간 딱 벗어지는 것입니다. 그다음부터는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허물을 벗기 전과 벗은 이후는 완전히 다릅니다. 바울이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이 조금 달라지고 마음이 조금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셨다는 것을 전제로 그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이 새롭게 변화시키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된 사람이기에, 이제 사람을, 특히 가족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먼저 나의 위치를 생각해 봅시다. 다시 따라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다른 것을 다 잊더라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예수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이 모든 문제가 끝난 가운데, 자녀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하면 다 응답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바울이 그랬잖아요. 자기도 자기 과거를 잊어버리고, 자기 과거를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는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을 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평가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한번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과 저도, 모든 것의 배경에는 항상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도 새롭게 변화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려면, 가장 기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저는 가정에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결혼을 했고 자녀가 한두 명 있다, 이것을 기본 상황으로 삼겠습니다. 그러면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나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다 각자 생활을 합니다. 자녀는 학교에 있다가 학원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고, 남편은 회사에 갔다가 집에 오고, 배우자도 직장에 갔다가 집에 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깥에서 생활할 때는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잖아요. 어느 정도는 다 감춰 놓고,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다 눌러 놓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참습니다. 기본적으로 다 눌러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집에 옵니다. 그러면 뚜껑이 다 열리잖아요. 문을 딱 열면 무장이 해제됩니다. 바깥에서 긴장하며 눌러 놓았던 것이 싹 풀어집니다. 자녀도 풀어지고, 남편도 풀어지고, 아내도 풀어져서 들어옵니다. 그렇게 다 풀어진 가운데 서로를 보니, 하나도 안 맞는 것입니다. 특히 안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다 똑같은 사람인데 긴장이 풀어져 버리니 좋은 것도 좋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이 무엇이 됩니까. 감정을 털어놓는 쓰레기장처럼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 딱 풀어져 버리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바깥에서는 사람들과 긴장 관계에 있으니 어떻게든 좋게 말하려 하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다 풀어져서 나오는 것이 다 막말이고, 지시가 나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자녀는 자녀대로 전쟁, 남편은 남편대로 전쟁, 아내는 아내대로 전쟁, 다 전쟁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결혼을 하잖아요. 저도 사 년간 연애를 했는데, 그때는 그 여자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그 배우자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원수로 바뀌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나중에 황혼 이혼도 하고, 어느 때는 일이 년 만에 이혼하기도 합니다. 자녀는 왜 가출합니까. 사춘기 때 완전히 돌변해 싸움이 벌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눌러 두었던 감정이 다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적용하는 가운데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를 따라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가 기본 전제를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바꿉니까. 가정은 내 감정이 드러나 막말하는 데가 아니다, 이 기본 전제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름의 전제를 가지고 있잖아요. 내가 내 맘대로 하는 데다, 자고 싶으면 자고, 내가 자녀에게 말하면 다 들어야 한다, 이런 전제가 다 깔려 있습니다.
특히 저는 더 심할 것입니다. 저희 세대와 여러분 세대가 다르고, 여러분 세대와 자녀 세대가 또 다르잖아요. 저희는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눈치만 봐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뭐 하시는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든 관심이 거기 있어서 한마디 하시면 감정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싫어서 어떻게든 바꾸려고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느끼는 것은 또 다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정은 내 감정을 쏟아내는 데가 아니라는 것으로 전제를 바꿔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바꿉니까. 내가 조금 뭘 해야겠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 나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자녀, 내 배우자가 어제 한 것, 그저께 한 것, 조금 전에 한 것, 이것을 고린도후서 5장 17절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 나 잊어버려야겠다 하며 가슴에 담아 두는 것이 아닙니다.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놈의 생각은 그렇게 안 되잖아요. 자녀가 뭔가 잘못하면, 아 쟤 어제도 그랬는데, 그저께도 그랬는데, 하고 과거의 데이터가 쫙 들어옵니다. 아 쟤는 왜 저래 하고 딱 흘러갑니다. 이것이 나중에 보면 한이 되잖아요. 어머니들이 남편에게 그랬으니까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안에교회는 이 생각에 사슬이 있다고 봅니다. 그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사슬을 끊어야 자꾸자꾸 잊어버려집니다. 그런데 잊어버려지는 것이 무엇으로 됩니까. 내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됩니다. 오늘 주제처럼, 성령이 나에게 잊어버릴 수 있는 힘, 새롭게 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새롭게 보는 것은 잊어버려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를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자꾸 현실만 보도록, 거기에 생각이 확장되지 않도록 끊으시고, 생각이 확장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영을 끊으시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은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래서 제일 긴장되는 곳이 어디냐면 집입니다. 그러니 집에서 자꾸자꾸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다 보면, 생각의 사슬이 끊어지면서 어제 한 것이 기억이 안 납니다. 그리고 어제 한 것이 기억나더라도, 생각이 확장되어 에이 쟤는 원래 그런 애가 아니야 하는 데까지 가지 않고, 아 쟤 어제는 뭐 했지 하는 데이터로만 기억됩니다. 그래야, 바울이 말한 것처럼 관계가 회복됩니다.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먼저 생각의 사슬을 끊어야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원수 같은 말을 안 할 것 아니겠습니까. 자꾸자꾸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다 보면, 잊어버려지기도 하고 생각의 사슬이 끊어지면서 정상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관계가 유지되든지, 적어도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단지 내 마음을 조금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이 자꾸 바뀌면 바뀔수록 사람과의 관계가 자꾸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계속 그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녀가 원수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생각이 원수입니다. 내 배우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내 배우자를 그렇게 보고 있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그 생각이 틀어지고 확장되려 할 때,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합니다. 그냥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내안에교회는 결론이 깔끔합니다. 해결하는 방식도 깔끔하고, 그리고 쉽습니다. 그 일은 풀면 됩니다. 제가 어떻게 보면 증인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먼저 나 자신의 생각이 끊어지면 다른 사람도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행동하게 됩니다. 내 안에 속여진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을 볼 때 당연히 잘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했던 것을 빨리 끊으십시오.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십시오.
그러니 가장 영적 훈련을 심하게 하는 곳이 어디냐면 집입니다. 그리고 가장 영적 훈련을 많이 하게 하는 대상, 곧 나를 훈련시키는 사람이 누구냐면 나의 자녀입니다. 사춘기 자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두드리는 가운데, 가정이 정말 화목해지기를,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회복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바울이 먼저 자신이 달라지고 그것을 고린도 교회에 말함으로 관계가 회복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주님, 이 말씀이 나의 삶에 적용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나 자신이 나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나의 지나간 과거와 기억나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게 하시고, 치유되게 하시며, 잊어버리게 하시고, 그것 자체가 데이터로만 남게 하옵소서.
또한 나 자신이 변화된 만큼, 나의 배우자와 나의 가정과 나의 직장과 나의 사업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도록 주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
댓글 쓰기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