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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교회 2026.09.13.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일

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일


제목 성령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나를 먼저 붙드십니다


본문 에베소서 4장 31절부터 32절



저는 오늘 성령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나를 먼저 붙드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제목처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사실 오늘의 키워드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도 많은 사람을 만나 오셨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아직까지 용서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나 혼자 살 때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고, 안 봐야 할 사람도 매일 봐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가정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고, 또 우리 교회의 공동체입니다.


제가 조사해 보니, 사람은 참 필연적으로 멀리 있는 사람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늘 가까이 있는 사람과 원수가 생깁니다. 결국 그것이 싸움이 되고 분냄이 되어, 원수가 맺혀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원수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배경에 깔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내안에교회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서 원수를 맺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가. 그것도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지난주의 주제가 성령께서는 가족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평상시에 시니어들과 함께 삽니다. 그래서 조용하고, 요즘에는 각자 떨어져 지냅니다. 완전히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잠은 다 따로 자고, 하는 일도 저마다 다양합니다. 저는 주로 밤에 조금 늦게 자고, 배우자인 사모님은 저녁에 좀 일찍 잡니다. 그리고 아침 다섯 시 반, 여섯 시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저는 그때 한참 자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옆에 고집 센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지난주에 가족을 새롭게 한다고 했더니 이번 주에 도리어 제 속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제가 갈등을 겪는 것 중 하나가,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옆에서 새로운 것을 자꾸 요구할 때, 갑자기 속에서 짜증이 확 나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버럭 화를 냈겠지만, 이번에는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속에서 아 또 짜증 나네 하는 것이 딱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순간 방심하니까 또 몰려오는구나 하고, 저 자신을 지켰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이 가장 어려운 때가 어디냐면 가정입니다. 가정에서는 제가 다 무장 해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풀어지고, 감정도 풀어지고, 생각도 다 풀어집니다. 특히 집안의 가장이라고 하면 다 풀어져서, 무슨 말이든 나옵니다. 무장 해제되었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고, 나오는 말이 다 부정적인 말이고 잔소리입니다.


저도 지킨다고 했는데, 또 한순간 지키지 못한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키지 못했을 때 다시 저 자신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키지 못했을 때 항상 저에게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야 너 못 지키잖아, 너 또 실수했잖아, 또 실패했잖아. 그때 또다시 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다시 저를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완벽한 가운데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완벽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이 상태에서 부르신 것이고, 자꾸 바뀌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름을 불렀고, 다시 죄책감이 밀려오려 할 때 예수는 그리스도로 저를 지켰습니다.


제가 하나의 예를 들었지만, 제 속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힘든 때가 어느 때냐면,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입니다. 속에서 수많은 원수 맺음과 갈등이 쫙 올라옵니다. 그래서 계속 부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비판하고 거기서 끝나 그 비판을 붙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비판이 올라오면서도 그 이름을 붙잡고 계속 나아가는 저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러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저 목사의 말을 매주 들어야 하고, 한두 해 들은 것도 아닌데, 얼마나 내적으로 영적 전쟁을 하고 계실까 싶어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저 자신을 지키고 있고, 그 이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름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보다 제가 속에서 더 많은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여러분도 계속 영적 싸움을 이어 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5절을 근거로 무엇을 깨달았는가.


오늘 주제가 원수 맺는 것이고, 그 원수 맺음을 용서하는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 보면, 우리가 흔히 사람이 그냥 선악과 열매를 먹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선악과 열매를 딱 먹음으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벌어집니까. 당장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도망갑니다. 핑계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 속에서부터 하나님과 원수 맺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본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전에는 본능이 아니었는데, 이것이 본능이 되어 버렸기에 제가 본능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이 오시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른다 하더라도, 이 속에서 원수 맺는 것이 잠깐 없어지는 것이지, 이 본성 자체가 원수 맺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두 번째로 사람과 원수를 맺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조금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예배 조금 드린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이 마음속에 모셔야만 이 본성과 본능이 바뀌고, 더 바뀌는 것은 그 이름을 계속 불러야만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창세기 3장을 보면서, 아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철천지 원수구나, 그리스도로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그 본성이 남아 있구나, 그러면 내가 얼마나 바뀌느냐 하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를 때만 가능하구나 하는 것을 더 알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4장 31절부터 32절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이름으로 그 이름을 주셨는데, 구약 성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계속 누군가가 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 또 무엇이 나오냐면, 많은 왕들이 왔습니다.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 상하를 보면 왕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렇게 장황하게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왕들도 다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가장 완벽했던 왕이 누구입니까. 다윗 왕이고 솔로몬 왕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왕이 되고 난 다음에 달라져 버립니다. 스스로 그전에 세웠던 모든 것을 다 버립니다.


다윗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가장 총애하던 부하를 죽여 버립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다음부터 집안에 무엇이 들어옵니까. 살인이 들어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도망다닙니다. 나라가 완전히 어지러워집니다.


그 유명한 솔로몬 왕은 더합니다. 어렸을 때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가장 총명한 왕이었고 가장 부요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세우자마자 달라져 버립니다. 온갖 세상의 우상을 다 들여옵니다. 우상을 들여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부강해지려고 주변 나라 왕들의 자녀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 왕비들이 올 때 무엇이 딸려 옵니까. 그들이 가진 문화와 정치와 우상이 다 딸려 옵니다. 그들이 섬기던 것을 그대로 섬깁니다. 그러니 솔로몬도 완전히 타락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무엇이 나옵니까. 아무리 유명한 왕이라도, 아무리 지혜 있는 왕이라도, 아무리 뛰어난 왕이라도, 그 왕이 나라를 제대로 구원할 수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결국 누가 나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이신 그리스도가 등장합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복음서는 그냥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부터 안 된다 안 된다, 도대체 진정한 왕은 언제 오느냐 하는 그 결론이, 마태복음 1장 1절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 만나는 길을 여신 다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사도행전은 1장부터 28장까지, 성령이 세계로 계속 펼쳐 나가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펼쳐 나가는 가운데 각 지역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세계 복음화를 이루는가를 담은 것이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로 이어지는 신약의 서신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베소서 4장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행전 19장부터 20장에 나옵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는데, 그때가 주후 53년에서 56년경입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바울은 무려 3년간 사역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잠깐 복음을 전하고 지나갔지만,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 특히 에베소 교회에서는 3년 동안 가르쳤기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가르쳤습니다.


그 뒤 바울은 그곳을 떠났고, 나중에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가 주후 60년에서 62년경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세운 때로부터 대략 칠팔 년이 흘렀습니다. 그 칠팔 년 뒤에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가 에베소서 1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입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너희가 누구냐, 너희가 어떤 사람이냐를 밝히는 것이고, 4장부터 6장까지는 그러니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교회 안에 특별한 문제가 생겨 쓴 편지였지만, 에베소서는 특별한 문제보다는 앞으로 너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강조해 쓴 편지입니다. 특히 오늘 에베소서 4장 31절부터 32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지 칠팔 년이 흐르는 가운데, 교회 안에 많은 갈등이 생겼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갈등이 생기고 분내고 싸우고 원수 맺고 편을 짓는 일이 나오니, 그 안에서 너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한 것이 4장의 내용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우리는 먼저 에베소서를 1장부터 6장까지 보면서, 이 교회가 우리보다 수준이 높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가장 어렵기도 하고, 신앙적으로 가장 성숙한 교회에 쓴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에베소 교회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고백해 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이것을 다 밑바탕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일이니, 우리가 일 주부터 열여섯째 주까지 다룬 그 기본 내용도 에베소 교회가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예수이신 그리스도가 보내셨다, 출처가 분명하다, 마귀의 영도 아니고 무속의 영도 아니고 카리스마를 앞세운 영도 아니라, 예수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서 보내신 성령이다, 그분이 내 안에 들어오셨다, 말씀하신다, 인도하신다, 자녀임을 증거하신다, 이 속에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것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1절부터 32절에 무엇이 나옵니까. 악독함, 노함, 분냄, 떠드는 것, 비방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가 너희가 누구냐를 말하는 것이라면, 4장부터는 그러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칠 년이 흐르는 가운데, 내가 누구인가는 정확히,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행동의 측면에는 아직 많은 부분이 도달하지 못했다고 저는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베소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는데, 다 바깥에서 생활하다가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제가 에베소 지역에 가 보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경쟁 사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이기려 하는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이기려 하고, 빼앗으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하고, 나만 잘났다고 하는 것이 인간 속의 본성입니다. 바깥에서 그렇게 살다가 교회 안에 딱 들어오니, 삶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악독하고 떠들고 비방하는 것이 다 무엇입니까. 내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 들어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니, 바울이 무엇을 말합니까. 이제 너희는 용서하라, 서로 용서하라고 용서의 측면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중점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너희 마음을 용서로 바꾸어 그것을 없애라, 아니면 네 감정을 눌러 놓아라, 그런 측면에서 먼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근거를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자녀로서 용서하신 그것을 먼저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처럼, 제 속을 볼 때 영점 영영일 초, 영 초를 들여다보아도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좋은 것이 하나도 안 나옵니다. 내가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라 하더라도 좋은 것이 안 나옵니다. 속에서 계속 나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고 사람에 대해 부정하고 남에 대해 부정하고 나는 또 잘났다고 하는 것이 그냥 솟아 나옵니다. 제가 저 자신을 아무리 깊이 들여다보아도, 아무리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른다 하더라도, 속에서 그냥 나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자녀를 삼으신다고 하면, 이 세상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절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니, 너희도 그것을 더 기억하고 적용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용서하라고 말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용서하라고 계속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여러분과 저를 이끄신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저를 따라 해 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우선 다른 것을 다 제쳐 놓고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합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다음에 나는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세계 복음화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신문을 보고, 인터넷 뉴스를 보고, 어제 본 드라마를 떠올리고, 이번 주에 무엇이 흘러왔나 살펴보니, 대부분 다 싸움이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무엇이 나옵니까. 늘 갈등입니다.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뭉개 버릴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깎아내릴까, 저 사람이 가진 명예와 권세와 돈을 어떻게 빼앗을까, 이런 측면에서만 나옵니다.


어제 제가 커피숍에 갔습니다. 들으려던 것이 아닌데, 옆에서 누군가 전화 통화를 하니 귀에 들려왔습니다. 야 내가 이번에 뭔가를 하는데, 너도 이번에 한번 투자해 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상대가 가진 것을 어떻게든 가져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문에서 계속 나오는 것이 살인, 전쟁, 갈등입니다. 보면서, 야 참 많구나 했습니다. 오늘 주제가 원수 맺는 것이고 그것을 풀어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원수 맺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데 보니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원수 맺은 것을 풀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직접 가서 원수 맺은 것을 푸는 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우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바울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다 자녀 삼으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원수 맺은 것을 풀고 용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내 안에서 내 것을 풀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푸는 것은 그다음 일입니다. 그것을 풀려면 또 많은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우선은 내 안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가 그 사람을 생각하면, 제 에너지의 많은 부분이 거기 집중됩니다. 우리는 지금 바깥에서 경쟁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 분야에 위로도 사람이 있고 아래로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일에서 더 위로 올라가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내 시간과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거기 집중해서, 내가 걸려 있는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 에너지의 많은 부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과거에, 특히 내가 원수 맺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제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 예전부터 한이라는 단어가 있겠습니까. 한이라는 것은 특정한 대상을 향하여 속에 응어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하나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보니, 그 사람을 떠올리면 이것이 딱 올라와 제 생각이 쭉 그리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제 시간이 낭비되고, 에너지가 낭비되고, 힘이 낭비됩니다. 하루에 쓸 에너지가 이만큼인데 그것이 낭비되면서, 정말 집중해서 넘어가야 할 것을 못 넘어갑니다. 그리고 설령 실패했으면 그 사람 탓을 하면서 또 거기에 에너지를 씁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과 원수 맺은 것을 해결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내가 나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나를 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푼다는 것이, 내 감정이나 생각을 억지로 눌러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특히 제가 원수 맺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멀리 있는 사람과는 원수가 없습니다. 다 무엇입니까. 처음에 친해서, 야 좋다 좋다 하다가 자꾸 가까워집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 생깁니까.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어 저 사람은 나와 다르네, 어 쟤는 좀 이상한 애 아니야, 쟤는 또 저렇게 말하네 하면서, 속에서부터 감정이 자꾸 걸립니다. 그러면 이것이 쌓이고 쌓여 원수가 됩니다. 그러니 제가 조사해 보니, 멀리 있는 사람과 원수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과 원수인 것입니다.


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제 친구를 만납니다. 긴장 가운데 있을 때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이니 마음이 딱 풀어지면,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합니다. 가만히 보니, 아 이래서 가까이 있는 사람과 계속 가까이 지내기가 어렵구나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무려 오 년 이상,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왔습니다. 친구 사이도 만나서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꾸 섭섭함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가까이 있는 사람과 더 가까워지기가 어렵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데, 저의 방법은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로 쳐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제 삶에 적용해 보았지만, 여러분도 가만히 파악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에도 여러분과 제 속에 분명 원수 맺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다 무엇입니까.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기존에 원수 맺은 사람도, 내 속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속에 있는 응어리와 그 응어리를 붙잡고 있는 영을 깨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계속 만나는 사람은 다 가까이 있는 사람인데,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원수가 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앞에서는 무장이 해제됩니다.


특히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다 줍니다. 여러분이 원수 맺는 사람을 보면,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밑에 있는 사람과는 거의 원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그 사람은 나에게 맞추고 참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밑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상황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사람들이 계속 오는데, 매주 만나야 하는데 저 사람이 싫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선 나를 지켜야 합니다.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렇게 지키고, 집에 가서 또 생각나면 또 예수는 그리스도로 밀어내야 합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저절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꾸 나 자신을 지켜야만, 그 사람을 다시 만났을 때 어느 정도 정상으로 관계를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다 용서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나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나를 지켜야만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고, 세계 복음화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번 한 주간도 잘 살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를 지키고, 특히 성령님께서 그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계속 그리스도를 부르는 가운데, 한 주간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해결하신 것처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원수 맺을 수밖에 없는 모든 생각과 시선과 습관을 몰아내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고백하며 내 마음속에 심음으로,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가정과 직장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 자신을 먼저 지키게 하시고, 그 지킴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드러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원수 맺을 수밖에 없는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지금까지 삶 가운데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원수 맺어 왔는데,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과 지혜로 내 마음이 먼저 지켜지게 하시고, 내 마음에 먼저 천국이 이루어지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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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매번 시작만 하고 멈출까? —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결심이 오래가지 않는 진짜 이유 또 멈췄다 재현은 이번에도 3일째였습니다. 첫날은 됐습니다. 둘째 날도 됐습니다. 셋째 날 저녁, 회식이 있었습니다. 늦게 들어왔습니다. 피곤했습니다. 그날 안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습니다. "어제 끊겼으니까 오늘은 다시 시작이네." "역시 나는 꾸준함이 없어." "의지가 약한 건가." 재현은 이 패턴을 수십 번 반복했습니다. 다이어트. 운동. 독서. 매번 시작했고, 매번 같은 지점에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정말 의지 문제였습니까? 문제는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지가 약하다." 그런데 정확하게 봅시다. 재현이 밥을 먹는 것은 의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상황이 행동을 만듭니다. 재현이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은 의지로 합니까? 아닙니다. 알림이 오면 봅니다. 습관적으로 잠금을 풉니다. 조건이 행동을 만듭니다. 인간은 기억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늘 해야지"*라고 기억해서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상황이 오면 자동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는데 를 *"기억날 때 해야지"*로 설계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억이 약한 날, 피곤한 날, 바쁜 날. 안 됩니다. 기억은 상황보다 약합니다. 문제는 의지가 약한 게 아닙니다. 구조가 없는 겁니다. 감정 기반 실행의 한계 수진을 봅시다. 기분 좋은 저녁에는 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는데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생각이 멈춥니다. "오늘은 잘 됐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로 바쁩니다. 상사 카톡이 와 있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완전히 잊었습니다. 왜입니까? 기분 좋은 저녁에 됐던 건 수진의 감정 상태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아침에 안 됐던 건 감정 상태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기준이면 ...

관찰4 도움이 되었다고 참인 것은 아니다

도움이 되었다고 참인 것은 아니다 앞 단계에서는 자동 결론이 행동을 대신 결정하기 전에 짧은 틈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때 자연스러운 반론이 생깁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다른 말을 하면 생각이 잠깐 멈추는 것 아닌가?” 그럴 수 있습니다. 관찰1부터 세 번 미뤄 온 이 비교를, 오늘 약속대로 정면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 첫 답은 회피가 아니라 인정입니다. “잠깐 멈춰”, “아직 모른다”, “지금 할 일 하나”, “먼저 확인하자” — 이런 문장도 생각의 흐름을 바꾸는 중단점으로 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단계에서는 어떤 문장이 가장 강한지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두 질문을 구분합니다. 문장이 순간적으로 어떤 기능을 했는가? 문장이 주장하는 내용은 실제로 참인가? 1. 같은 기능을 해도 의미는 다를 수 있다 문장 주된 의미 잠깐 멈춰 진행 중인 흐름을 중단하라는 명령 아직 모른다 현재 정보만으로 결론 내릴 수 없다는 확인 지금 할 일 하나 행동의 범위를 한 가지로 좁히는 지시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존재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 네 문장은 모두 생각의 흐름을 잠시 바꾸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지금 할 일 하나”는 행동에 관한 말이고, “아직 모른다”는 정보의 한계를 확인하는 말이며, “예수는 그리스도”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주장입니다. 순간적 기능이 비슷하다고 의미까지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한 줄로 미리 말해 두자면,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인류의 근본 문제를 풀러 온 구원자를 뜻하는 말이고, 이 문장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주장입니다. 그 뜻과 근거를 제대로 검토하는 것은 관찰5의 몫입니다. 여기서는 “이건 기능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주장이다”라는 위치만 잡아 둡니다. 2. 도움이 됐다는 경험이 진리를 증명하지 않는다 시험을 앞두고 “나는 반드시 합격한다”고 말한 뒤 마음이 안정되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장은 일정한 기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안정됐다는 사실...

[내안에교회 초급훈련 A1]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아무 느낌이 없을 때, 멈추지 않는 방법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당신은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무 느낌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거지?" "나는 전이랑 완전히 똑같은데?" "이건 괜히 시간 낭비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멈춥니다. 그런데 멈추기 전에 질문 하나만 더 해봅시다. 당신에게 정말 아무 변화도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즉각적인 체감이 없었다" 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결론을 너무 빨리 내린 걸까요? 느낌은 변화를 측정하는 가장 늦은 지표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효과가 있다면 즉시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구조적인 변화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운동을 시작한 첫날에 근육이 눈에 보입니까? 당신이 투자를 시작한 첫날에 수익이 확정됩니까? 당신이 약을 한 번 먹었다고 병이 바로 낫습니까? 대부분의 변화는 아주 미세한 틈에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자동으로 흘러가던 흐름이 1초라도 느려졌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벽하지 않네. 그렇다면 무효야."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체감이 없으면 그 즉시 실패 판정을 내려버립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를 불렀는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끝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급함입니다. 그래서 기록을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해봅시다. 당신은 논리적인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실험해봅시다.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확신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측정하자는 겁니다. 7일 기록 실험 방법 오늘부터 7일 동안, 당신은 하루에 딱 1분만 투자합니다. 매일 이 세 가지를 기록하십시오. 오늘 하루 동안 당신이 "예수는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