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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교회 주일말씀 2026.09.30 성령강림 후 열일곱째 주일

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열일곱째 주일
 
제목 성령은 인정욕구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십니다
 
본문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11절
 
 
저는 오늘 성령은 인정욕구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주가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원수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미 원수 같은 사람이 있고, 앞으로도 원수를 맺을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측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라고 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원수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결국 원수를 맺는 것은, 이 속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영광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원수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채워지지 않을 때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 섭섭함과 서운함과 답답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또 채우려고 다른 방법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섭섭함과 서운함과 답답함, 그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이 마음을 어떻게 바꾸시느냐,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지난주에 우리가 원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사실 원수 같은 마음을 분명 가지고 있고, 육십 년 인생을 살아왔으니 제 마음속에 원수 같은 사람, 아직도 응어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분명 몇 명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그분들과 매주 마주쳤다면 이것이 계속 커졌을 텐데, 헤어진 지 오래되고 세월이 흘러가다 보니, 마치 바위가 바람에 조금씩 깎여 내려가듯 저도 그런 마음이 별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또 그 사람을 만나면 분명히 다시 올라올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그것을 어떻게 예수는 그리스도로 끊을 것이냐 하며 계속 집중적으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가만히 보니, 특히 원수 같은 마음이 계속 발동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께 정말 말하기 창피한데, 저는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이것이 막 솟아오릅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솟아오르는 것을 지각하지도 못했고, 솟아오를 때에는 내가 뭔가 잘난 것 같은, 그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태클 거는 마음에 도리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번 주에도 누군가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으면, 잘 모르겠는데 분노가 막 올라오고, 내가 잘났다는 마음이 확 올라옵니다. 예전에는 그 자체로, 그래도 대단하다며 거기서 끝났을 텐데, 이제는 이것이 계속 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이 분리되고 나를 계속 신으로 섬기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 보이니, 계속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안 들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 설교를 안 들으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또 안 듣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 들으면서, 속에서 계속 전쟁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짜증이 나면서, 아 안 들으면 되는데, 하면서도 또 듣고 있고, 속에서는 계속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면서도, 결론을 맺을 때 저 자신이 대단한 쪽으로도 가지 않고,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내가 대단하다며 나를 신으로 섬기려는 것과도 싸우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일이고, 언제든 여러분과 저도 그럴 것입니다. 다 직업을 가지고 계시고 전문 분야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러다 보면 다 경쟁입니다. 경쟁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증 관계도 있는 상황인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를 계속 깨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은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생각해 보는데, 무려 육십 몇 년 동안 가지고 있던 것이니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것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긴장하고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가장 극도로 짜증을 내는 그 가운데서도, 설교를 듣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며 기도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에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적용되면서 계속 갈등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또 제가 이렇게 말씀을 전하니, 여러분 마음속에서 아니 저렇게 들으면 은혜 받으면 되지 않느냐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저에 대해 생각하시는 부분이고,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 분명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원수 맺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내면을 잘 살피셔서 영적 전쟁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계속 그 이름을 부르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이 항상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이름을 계속 24시간 부르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과 15절을 얼마나 깊이 알게 되었는가.
 
저는 이번 주에 창세기 3장을 보면서, 아 인간의 근본 문제가 정말 심각하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 조금 있으면 되고, 교회 생활 조금 잘하면 되고, 가정이 행복하면 되고, 내 자녀가 잘되면 되는 것으로, 인생을 오케이냐 노냐 정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 오면, 인간은 그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은 일단 하나님의 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서, 하나님이 오실 때 인간은 죽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억하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태어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생각으로 인해 살아가는 나를 그냥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상숭배는 당연하고, 나 잘난 것으로 살다가 질병 가운데 있다가 결국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받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성을 자손에게 물려줍니다. 그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모든 밑바탕에 다 그 근본 문제가 깔려 있고, 잠깐잠깐 위에서 조금 잘되는 것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를 우리 스스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으니, 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라는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는, 그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된 것입니다.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부터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권세가 다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비결이 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자꾸 부르면 자꾸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천사를 통해 보호하시고,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 가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단을 깨뜨릴 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 이미 주어진 것인데,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내가 얼마나 부르고 얼마나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자꾸자꾸 드러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아 인간의 근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그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더 깊이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11절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인간이 다 망했을 때, 근본 문제가 생겨 절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잡혀 있을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쭉 흘러오는 것이 무엇이냐면, 항상 밑바탕에 그리스도가 오신다 오신다 하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왕도 너무 많이 왔고, 선지자도 많이 왔고, 제사장도 많이 왔고, 유명한 사람이 수도 없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면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너무 연약한 모습이 드러나 대단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약 시대의 정점이라 생각하는 다윗 왕도 결국 나중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위해 다 사용합니다. 죽을 때까지 정신 차리고 있는 왕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의 사건을 보면서, 이야 진짜 참된 왕은 없나, 참된 왕이 온다고 하는데 언제 오나, 이것을 기다리는 것이 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다가 신약의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오시고자 하시던 그분이, 드디어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복음을 보면, 그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분이 오셔서 죽으심으로,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인간의 근본 문제, 나를 포함한 모든 근본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모든 축복과 권세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저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 보내신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니 복음서에서 육체로 계시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제 성령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똑같은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안에 오신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부터 성령이 오셔서 쭉 흘러갑니다. 사도행전은, 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드디어 세계를 복음화하시는 모든 과정, 곧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누가인데, 누가가 주로 추적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부터 등장하는 인물이 바울이고, 바울이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왜 이렇게 나옵니까.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이 전도하다가,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2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바울은 주로 아시아, 오늘날로 치면 터키 지역에서 계속 전도했습니다. 터키를 넘어가면 유럽입니다. 터키는 참 희한한 나라라서, 이쪽은 아시아이고 저쪽은 유럽입니다. 조금만 가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에만 머물려고 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헤매고 있다가 환상이 보였습니다. 건너편 유럽에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응답이라 여기고 건너갑니다. 건너가서, 유럽의 첫 성이 어디냐면 오늘 본문 빌립보서의 빌립보입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며,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저도 그 그리스, 지금 나라로 따지면 그리스에 가 보았습니다. 이 주일 동안 있었는데, 빌립보에도 가 보았습니다.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한 곳이 어디냐면 개울가입니다. 그 개울가까지 가 보았는데, 거기에 루디아 기념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 보았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한 때가 주후 49년에서 50년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간수장과 루디아를 통해 교회가 세워져 쭉 흘러가다가 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도행전 27장, 28장에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가 대략 주후 60년경입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빌립보 교회의 소문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 소문에는 교회를 세운 루디아 이야기는 안 나오고,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입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갈등이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사람도 따르는 무리가 있고 저 사람도 따르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그냥 한두 번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 교회의 중직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갈라질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고, 계속 편이 생기니 교회가 이상한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바울이 듣고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특히 오늘은 빌립보서 2장인데, 그 두 사람을 향해 타이르는 훈계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하라, 너희 둘이 헛된 영광과 허영심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취하려 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도리어 낮추고 낮추셨고 나중에 하나님이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허영심으로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낮추고 낮추다 보면 나중에 하나님이 높이신다, 그 진정으로 높여지는 것을 지금부터 경험하라고 쓴 것이 오늘 빌립보서 2장의 내용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빌립보 교회는 주후 49년에서 50년에 세워졌고, 십 년이 흘러 주후 60년이 되었습니다. 십 년 동안 그 교회가 탄탄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빌립보 교회의 수준은, 여러분과 제가 있는 내안에교회의 수준보다 훨씬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대 최고의 전도자인 바울이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도 이미 갈등이 있었지만, 이미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가 있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왜 불러야 합니까.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속에서 끊임없이 죄의 습성이 나오니, 그것을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만 밀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우리가 말하는 이 여섯 가지 기본이 딱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지금 내안에교회가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까지 이어 온 그 성령에 대해서도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떠돌아다니는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보증하시어 보내신 영이고, 내 안에 거하시는 영이고,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영이고, 절대 떠나지 않는 영이고, 이 안에서 계속 말씀을 생각나게 하여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영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원수 맺는 것을 완화시키는 영입니다. 그것을 빌립보 교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살아가다가, 결국 두 편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사람의 갈등이 너무 심하니 바울에게까지 들린 것입니다. 두 사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다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그냥 나뉘면 되지만, 옛날에는 교회가 세워진 지 십 년밖에 안 되었는데 나뉜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나뉘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또 나뉘고 또 나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늘 조금 더 깊이 열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허영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허영심이라는 그 단어만 아십니까. 제가 오늘 자료의 도움을 받아 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허영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케노독시아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이 영광을 구하는데 헛된 영광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영광이라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영광이라는 것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가 있고, 내적인 잠재력이 있고, 내면의 탁월함이 있는데, 그것이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거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저 사람 자체의 탁월함이 보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니, 와 저 사람 대단하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러니 영광이라는 단어와 인정한다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되는 부정적인 단어가 허영입니다. 허영은 무엇이냐면, 속에 탁월함이 있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속에 탁월함이 없는데 뭔가로 채워서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런 의도로 드러내니 부정적인 것이 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보기에 질투가 생기고 반감이 생깁니다. 그것이 허영심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속에서 허영심이라는 것은, 더 쉽게 표현하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홀로 있는 독립적인 단어가 아니라, 꼭 사람과의 관계에 연결된 단어입니다. 사람은 속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인정받기 이전에 사람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혼자 세워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셨을 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영광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무엇이냐면,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부정적인 상태로 간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취하고 허영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탁월함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드러냄이 무엇이냐면, 저 사람과의 관계에서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비교당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상대적인 우월감을 채우기 위해 자꾸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허영심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그 상태에 있기에,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가 헛된 영광을 취하고 있는데,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동등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낮추신 가운데, 결국 나중에 하나님이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곧 너희가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어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저 사람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계속 과도하게 나타내면, 너희를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되고 교회 안의 분위기도 그렇게 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너를 높이시기 전까지 계속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높이시든 낮추시든 너희는 네가 할 일을 겸손함으로 하고, 나중에 높이시고 안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거기에 이렇다 저렇다 기준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높이시면, 그때는 영광 받고 인정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제 실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먼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는 빌립보 교회에 갈등이 있다고 했는데, 갈등이 있어도 그 교회는 기본적으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흘러가는 가운데 문제가 생기고 다 망가질 것 같아도,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내안에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먼저 기본적으로 인정합시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기본적으로 여러분과 저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인간의 근본 문제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통해 벗어났고, 지금 세계 복음화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도 허영심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많습니다.
 
우선 이것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른다 하더라도, 내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라 로봇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뭔가를 했습니다. 가정에서 뭔가를 했습니다. 뭔가를 할 때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함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내가 했으니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 주면, 너 대단하다,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 줘서 감사하다 하면, 그냥 오케이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돌아오는 리턴, 그것이 없을 때가 문제입니다. 내가 뭔가 열심히 하고 많이 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조금밖에 없거나 거의 없거나, 내가 받아야 할 만한 대가도 없을 때, 그때가 문제입니다.
 
이때 내면에서 딱 오는 것이 있습니다. 속삭임이 밀려옵니다. 야 너 뭐 했는데 사람들이 인정 안 해 주네. 야 너 열심히 했잖아. 왜 사람들이 너를 알아줄 줄 모를까. 목사님은 왜 너를 안 쳐다보지. 왜 그만한 대가도 안 오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교회에서는 대부분 봉사가 많습니다. 야 열심히 했는데, 집사님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는 말이 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적거나 기대한 것만큼 오지 않으면, 당연히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서운함이 밀려온다는 것은 속삭임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야 그렇게 밤새 했는데 돌아오는 건 별로 없네. 어떤 사람은 감사합니다 하면서도 근데 이건 안 됐네요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속에서 딱 옵니다. 저 사람은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태클만 거네. 에이 다음부터 그런 일 안 해. 그런 말이 계속 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자녀를 위해 뭔가 열심히 했는데 자녀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야 그만큼 했는데 돌아오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다음부터 저런 거 절대 안 해야지 하는 말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문제입니다. 일이 잘될 때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를 인정 안 했잖아, 그런데 왜 저 사람은 더 인정해 줄까, 하고 비교가 됩니다. 저 집사님은, 저 사람은 인정해 주는데 나는 더 인정 안 해 주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 교회 썩어빠진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이 자꾸 커집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작은 단추 하나로 생각이 커지는 그 내면의 구조가 문제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렇게 생각이 쫙 커지려 할 때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여러분과 제가 하는 일 속에서, 저 사람은 인정받는데 너는 안 되잖아, 너는 했는데 왜 인정받지 못할까, 왜 칭찬받지 못할까 하는 그것, 이것이 영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의 영이고 질투의 영입니다.
 
저도 이 질투가 타고난 것임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제가 집에서 가끔 여덟 살, 세 살, 두 살짜리 아이를 봅니다. 하나를 딱 주면, 세 살짜리가 딱 봅니다. 왜 넌 안 주냐는 것입니다. 두 살짜리도 뭐 하다가 딱 자기 것을 잡습니다. 사과가 두 개밖에 안 남으면 서로 눈치를 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이놈의 질투는 타고난 것이구나, 창세기 3장의 문제구나 했습니다.
 
그러니 이 속에 있는 질투와 비교, 이것은 영입니다. 그냥 마음을 누르면 되겠다 싶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마음을 눌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누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받는 것인데, 안 될 때 올라오는 것이 막 커집니다. 이 질투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뭔가를 했을 때 꼭 인정받아야 한다, 이 정도 했으니 이 정도 이상 인정받아야 한다 하는 그 기준을, 여러분과 제가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꾸 줄여야 합니다. 그 영향력과 힘을 자꾸자꾸 줄여야 합니다.
 
둘째로, 여러분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너무 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너무 강한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어 다양합니다. 나는 너무 인정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것을 살펴보시고,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십시오. 너무 인정받고 싶어 미치도록 애쓴다면,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그냥 알아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그 영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내 영의 많은 부분을 그 시기와 질투와 허영심의 영이 잡고 있다는 것을 먼저 지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는 그리스도께 넘겨야 합니다. 특히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아십니까.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그것도 허영심에 연결된 영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가치가 자꾸 깊어져야 합니다. 명품을 채워서, 배우자를 내세워서, 학력을 채워서, 돈을 채워서 내 가치를 자꾸 높이려는 것은 무엇이냐면, 나의 존재 가치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자꾸 불러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가 자꾸 드러나면, 허영심으로 채우던 나의 가치가 자꾸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든 안 하든, 다른 사람이 더 대단하든 아니든, 나는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가치로 인하여 더더욱 높여지면 높여질수록,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한 영향력이 자꾸자꾸 줄어듭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것을 다 잊어버릴 것 같아도, 이것만은 하나하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이것만 계속 고백하고, 힘들어도 고백하고 묵상하다 보면, 내 속에 있는 허영심,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것이 자꾸자꾸 줄어들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가 더 드러나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이 돈과 명예와 권세와 물질로 채워져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고, 저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님께서, 내 속에 있는 질투의 영과 허영심의 영을,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를 때 성령이 함께하셔서 그 영향력을 자꾸 줄여 주시고, 결국 그로 인하여 나의 존재 가치가 더 드러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성령은 인정욕구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십니다
 
본문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11절
 
 
저는 오늘 성령은 인정욕구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주가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원수에 대해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미 원수 같은 사람이 있고, 앞으로도 원수를 맺을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측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라고 하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원수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결국 원수를 맺는 것은, 이 속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영광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원수 같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채워지지 않을 때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 섭섭함과 서운함과 답답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또 채우려고 다른 방법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섭섭함과 서운함과 답답함, 그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이 마음을 어떻게 바꾸시느냐,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지난주에 우리가 원수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사실 원수 같은 마음을 분명 가지고 있고, 육십 년 인생을 살아왔으니 제 마음속에 원수 같은 사람, 아직도 응어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분명 몇 명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그분들과 매주 마주쳤다면 이것이 계속 커졌을 텐데, 헤어진 지 오래되고 세월이 흘러가다 보니, 마치 바위가 바람에 조금씩 깎여 내려가듯 저도 그런 마음이 별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또 그 사람을 만나면 분명히 다시 올라올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그것을 어떻게 예수는 그리스도로 끊을 것이냐 하며 계속 집중적으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가만히 보니, 특히 원수 같은 마음이 계속 발동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께 정말 말하기 창피한데, 저는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이것이 막 솟아오릅니다. 예전에는 그렇게 솟아오르는 것을 지각하지도 못했고, 솟아오를 때에는 내가 뭔가 잘난 것 같은, 그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태클 거는 마음에 도리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번 주에도 누군가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으면, 잘 모르겠는데 분노가 막 올라오고, 내가 잘났다는 마음이 확 올라옵니다. 예전에는 그 자체로, 그래도 대단하다며 거기서 끝났을 텐데, 이제는 이것이 계속 가다 보면 사람과 사람이 분리되고 나를 계속 신으로 섬기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 보이니, 계속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안 들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 설교를 안 들으면 되지 않느냐 하시겠지만, 또 안 듣는 것도 아닙니다. 계속 들으면서, 속에서 계속 전쟁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짜증이 나면서, 아 안 들으면 되는데, 하면서도 또 듣고 있고, 속에서는 계속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면서도, 결론을 맺을 때 저 자신이 대단한 쪽으로도 가지 않고,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내가 대단하다며 나를 신으로 섬기려는 것과도 싸우고 있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일이고, 언제든 여러분과 저도 그럴 것입니다. 다 직업을 가지고 계시고 전문 분야를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러다 보면 다 경쟁입니다. 경쟁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애증 관계도 있는 상황인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를 계속 깨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은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생각해 보는데, 무려 육십 몇 년 동안 가지고 있던 것이니 쉽게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그것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긴장하고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가장 극도로 짜증을 내는 그 가운데서도, 설교를 듣고 있는 저 자신을 보며 기도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에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적용되면서 계속 갈등 가운데 계실 것입니다. 또 제가 이렇게 말씀을 전하니, 여러분 마음속에서 아니 저렇게 들으면 은혜 받으면 되지 않느냐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저에 대해 생각하시는 부분이고,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대로 분명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원수 맺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내면을 잘 살피셔서 영적 전쟁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계속 그 이름을 부르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이 항상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이름을 계속 24시간 부르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두 번째.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과 15절을 얼마나 깊이 알게 되었는가.
 
저는 이번 주에 창세기 3장을 보면서, 아 인간의 근본 문제가 정말 심각하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돈 조금 있으면 되고, 교회 생활 조금 잘하면 되고, 가정이 행복하면 되고, 내 자녀가 잘되면 되는 것으로, 인생을 오케이냐 노냐 정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 오면, 인간은 그 수준의 문제가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인간은 일단 하나님의 영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서, 하나님이 오실 때 인간은 죽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억하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기가 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식으로 태어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생각으로 인해 살아가는 나를 그냥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상숭배는 당연하고, 나 잘난 것으로 살다가 질병 가운데 있다가 결국 죽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받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성을 자손에게 물려줍니다. 그것이 인간의 근본 문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모든 밑바탕에 다 그 근본 문제가 깔려 있고, 잠깐잠깐 위에서 조금 잘되는 것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를 우리 스스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으니, 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라는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러분과 저는, 그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요한복음 1장 12절처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된 것입니다.
 
그다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부터 우리에게 모든 축복과 권세가 다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누리는 비결이 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을 자꾸 부르면 자꾸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천사를 통해 보호하시고,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 가게 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단을 깨뜨릴 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 이미 주어진 것인데,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내가 얼마나 부르고 얼마나 내면화하느냐에 따라 자꾸자꾸 드러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아 인간의 근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그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더 깊이 알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기반으로 오늘 본문을 간단히 설명함.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11절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인간이 다 망했을 때, 근본 문제가 생겨 절대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잡혀 있을 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쭉 흘러오는 것이 무엇이냐면, 항상 밑바탕에 그리스도가 오신다 오신다 하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왕도 너무 많이 왔고, 선지자도 많이 왔고, 제사장도 많이 왔고, 유명한 사람이 수도 없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면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너무 연약한 모습이 드러나 대단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약 시대의 정점이라 생각하는 다윗 왕도 결국 나중에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위해 다 사용합니다. 죽을 때까지 정신 차리고 있는 왕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의 사건을 보면서, 이야 진짜 참된 왕은 없나, 참된 왕이 온다고 하는데 언제 오나, 이것을 기다리는 것이 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다가 신약의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오시고자 하시던 그분이, 드디어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복음을 보면, 그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분이 오셔서 죽으심으로,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인간의 근본 문제, 나를 포함한 모든 근본 문제를 다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모든 축복과 권세를 회복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저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 보내신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니 복음서에서 육체로 계시던 그리스도가 하늘로 올라가셔서, 이제 성령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똑같은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안에 오신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부터 성령이 오셔서 쭉 흘러갑니다. 사도행전은, 이 안에 오신 성령께서 드디어 세계를 복음화하시는 모든 과정, 곧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누가인데, 누가가 주로 추적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부터 등장하는 인물이 바울이고, 바울이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여행을 갑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왜 이렇게 나옵니까. 사도행전 13장부터 바울이 전도하다가,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2차 전도여행을 합니다. 바울은 주로 아시아, 오늘날로 치면 터키 지역에서 계속 전도했습니다. 터키를 넘어가면 유럽입니다. 터키는 참 희한한 나라라서, 이쪽은 아시아이고 저쪽은 유럽입니다. 조금만 가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에만 머물려고 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 헤매고 있다가 환상이 보였습니다. 건너편 유럽에 있는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응답이라 여기고 건너갑니다. 건너가서, 유럽의 첫 성이 어디냐면 오늘 본문 빌립보서의 빌립보입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며,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저도 그 그리스, 지금 나라로 따지면 그리스에 가 보았습니다. 이 주일 동안 있었는데, 빌립보에도 가 보았습니다.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한 곳이 어디냐면 개울가입니다. 그 개울가까지 가 보았는데, 거기에 루디아 기념교회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 보았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한 때가 주후 49년에서 50년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간수장과 루디아를 통해 교회가 세워져 쭉 흘러가다가 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도행전 27장, 28장에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때가 대략 주후 60년경입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 빌립보 교회의 소문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 소문에는 교회를 세운 루디아 이야기는 안 나오고,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입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갈등이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사람도 따르는 무리가 있고 저 사람도 따르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에 그냥 한두 번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 교회의 중직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갈라질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고, 계속 편이 생기니 교회가 이상한 쪽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바울이 듣고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특히 오늘은 빌립보서 2장인데, 그 두 사람을 향해 타이르는 훈계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하라, 너희 둘이 헛된 영광과 허영심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취하려 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도리어 낮추고 낮추셨고 나중에 하나님이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허영심으로 자기를 높이려 하지만, 낮추고 낮추다 보면 나중에 하나님이 높이신다, 그 진정으로 높여지는 것을 지금부터 경험하라고 쓴 것이 오늘 빌립보서 2장의 내용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
 
빌립보 교회는 주후 49년에서 50년에 세워졌고, 십 년이 흘러 주후 60년이 되었습니다. 십 년 동안 그 교회가 탄탄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빌립보 교회의 수준은, 여러분과 제가 있는 내안에교회의 수준보다 훨씬 높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대 최고의 전도자인 바울이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도 이미 갈등이 있었지만, 이미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믿음 체계가 있었습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왜 불러야 합니까.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속에서 끊임없이 죄의 습성이 나오니, 그것을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만 밀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우리가 말하는 이 여섯 가지 기본이 딱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지금 내안에교회가 성령강림 후 열여섯째 주까지 이어 온 그 성령에 대해서도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떠돌아다니는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이신 그리스도를 보증하시어 보내신 영이고, 내 안에 거하시는 영이고,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영이고, 절대 떠나지 않는 영이고, 이 안에서 계속 말씀을 생각나게 하여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영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원수 맺는 것을 완화시키는 영입니다. 그것을 빌립보 교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살아가다가, 결국 두 편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오늘은 이 두 편으로 갈라지는 것을 조금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사람의 갈등이 너무 심하니 바울에게까지 들린 것입니다. 두 사람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다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그냥 나뉘면 되지만, 옛날에는 교회가 세워진 지 십 년밖에 안 되었는데 나뉜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나뉘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또 나뉘고 또 나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늘 조금 더 깊이 열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허영심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허영심이라는 그 단어만 아십니까. 제가 오늘 자료의 도움을 받아 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허영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케노독시아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이 영광을 구하는데 헛된 영광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영광이라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영광이라는 것은 이런 뜻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가 있고, 내적인 잠재력이 있고, 내면의 탁월함이 있는데, 그것이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거나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저 사람 자체의 탁월함이 보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니, 와 저 사람 대단하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그러니 영광이라는 단어와 인정한다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되는 부정적인 단어가 허영입니다. 허영은 무엇이냐면, 속에 탁월함이 있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속에 탁월함이 없는데 뭔가로 채워서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런 의도로 드러내니 부정적인 것이 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보기에 질투가 생기고 반감이 생깁니다. 그것이 허영심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 속에서 허영심이라는 것은, 더 쉽게 표현하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홀로 있는 독립적인 단어가 아니라, 꼭 사람과의 관계에 연결된 단어입니다. 사람은 속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인정받기 이전에 사람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혼자 세워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을 만드셨을 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영광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무엇이냐면,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부정적인 상태로 간 것입니다. 헛된 영광을 취하고 허영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탁월함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드러냄이 무엇이냐면, 저 사람과의 관계에서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비교당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상대적인 우월감을 채우기 위해 자꾸 과도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허영심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그 상태에 있기에,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가 헛된 영광을 취하고 있는데, 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동등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셨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낮추신 가운데, 결국 나중에 하나님이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곧 너희가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어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저 사람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계속 과도하게 나타내면, 너희를 따르는 사람도 그렇게 되고 교회 안의 분위기도 그렇게 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너를 높이시기 전까지 계속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높이시든 낮추시든 너희는 네가 할 일을 겸손함으로 하고, 나중에 높이시고 안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거기에 이렇다 저렇다 기준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높이시면, 그때는 영광 받고 인정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이제 실제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먼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는 빌립보 교회에 갈등이 있다고 했는데, 갈등이 있어도 그 교회는 기본적으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흘러가는 가운데 문제가 생기고 다 망가질 것 같아도,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내안에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먼저 기본적으로 인정합시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기본적으로 여러분과 저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인간의 근본 문제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를 통해 벗어났고, 지금 세계 복음화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도 허영심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많습니다.
 
우선 이것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른다 하더라도, 내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나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버려야 한다, 그러면 인간이 아니라 로봇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은 정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뭔가를 했습니다. 가정에서 뭔가를 했습니다. 뭔가를 할 때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함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내가 했으니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고 난 다음에, 다른 사람이 인정을 해 주면, 너 대단하다,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 줘서 감사하다 하면, 그냥 오케이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돌아오는 리턴, 그것이 없을 때가 문제입니다. 내가 뭔가 열심히 하고 많이 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조금밖에 없거나 거의 없거나, 내가 받아야 할 만한 대가도 없을 때, 그때가 문제입니다.
 
이때 내면에서 딱 오는 것이 있습니다. 속삭임이 밀려옵니다. 야 너 뭐 했는데 사람들이 인정 안 해 주네. 야 너 열심히 했잖아. 왜 사람들이 너를 알아줄 줄 모를까. 목사님은 왜 너를 안 쳐다보지. 왜 그만한 대가도 안 오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교회에서는 대부분 봉사가 많습니다. 야 열심히 했는데, 집사님 정말 대단했습니다 하는 말이 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적거나 기대한 것만큼 오지 않으면, 당연히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서운함이 밀려온다는 것은 속삭임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야 그렇게 밤새 했는데 돌아오는 건 별로 없네. 어떤 사람은 감사합니다 하면서도 근데 이건 안 됐네요 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속에서 딱 옵니다. 저 사람은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태클만 거네. 에이 다음부터 그런 일 안 해. 그런 말이 계속 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자녀를 위해 뭔가 열심히 했는데 자녀가 아무 말도 안 하면,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야 그만큼 했는데 돌아오는 게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다음부터 저런 거 절대 안 해야지 하는 말이 옵니다. 바로 그때가 문제입니다. 일이 잘될 때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너를 인정 안 했잖아, 그런데 왜 저 사람은 더 인정해 줄까, 하고 비교가 됩니다. 저 집사님은, 저 사람은 인정해 주는데 나는 더 인정 안 해 주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저 사람 이상한 사람 아니야, 이 교회 썩어빠진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이 자꾸 커집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작은 단추 하나로 생각이 커지는 그 내면의 구조가 문제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렇게 생각이 쫙 커지려 할 때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왜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까. 여러분과 제가 하는 일 속에서, 저 사람은 인정받는데 너는 안 되잖아, 너는 했는데 왜 인정받지 못할까, 왜 칭찬받지 못할까 하는 그것, 이것이 영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의 영이고 질투의 영입니다.
 
저도 이 질투가 타고난 것임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제가 집에서 가끔 여덟 살, 세 살, 두 살짜리 아이를 봅니다. 하나를 딱 주면, 세 살짜리가 딱 봅니다. 왜 넌 안 주냐는 것입니다. 두 살짜리도 뭐 하다가 딱 자기 것을 잡습니다. 사과가 두 개밖에 안 남으면 서로 눈치를 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이놈의 질투는 타고난 것이구나, 창세기 3장의 문제구나 했습니다.
 
그러니 이 속에 있는 질투와 비교, 이것은 영입니다. 그냥 마음을 누르면 되겠다 싶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마음을 눌러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누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받는 것인데, 안 될 때 올라오는 것이 막 커집니다. 이 질투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뭔가를 했을 때 꼭 인정받아야 한다, 이 정도 했으니 이 정도 이상 인정받아야 한다 하는 그 기준을, 여러분과 제가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꾸 줄여야 합니다. 그 영향력과 힘을 자꾸자꾸 줄여야 합니다.
 
둘째로, 여러분 자신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을 너무 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너무 강한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어 다양합니다. 나는 너무 인정받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것을 살펴보시고,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십시오. 너무 인정받고 싶어 미치도록 애쓴다면,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 그냥 알아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그 영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내 영의 많은 부분을 그 시기와 질투와 허영심의 영이 잡고 있다는 것을 먼저 지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는 그리스도께 넘겨야 합니다. 특히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아십니까.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그것도 허영심에 연결된 영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가치가 자꾸 깊어져야 합니다. 명품을 채워서, 배우자를 내세워서, 학력을 채워서, 돈을 채워서 내 가치를 자꾸 높이려는 것은 무엇이냐면, 나의 존재 가치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자꾸 불러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가 자꾸 드러나면, 허영심으로 채우던 나의 가치가 자꾸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든 안 하든, 다른 사람이 더 대단하든 아니든, 나는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가치로 인하여 더더욱 높여지면 높여질수록,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한 영향력이 자꾸자꾸 줄어듭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것을 다 잊어버릴 것 같아도, 이것만은 하나하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이것만 계속 고백하고, 힘들어도 고백하고 묵상하다 보면, 내 속에 있는 허영심,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것이 자꾸자꾸 줄어들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가 더 드러나는 여러분과 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이 돈과 명예와 권세와 물질로 채워져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고, 저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님께서, 내 속에 있는 질투의 영과 허영심의 영을,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를 때 성령이 함께하셔서 그 영향력을 자꾸 줄여 주시고, 결국 그로 인하여 나의 존재 가치가 더 드러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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