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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2026.09.27.성령강림 후 열여덟째 주일

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열여덟째 주일

 

제목 성령은 명절의 부담을 복음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2장 12절부터 27절

 

 

저는 오늘 성령은 명절의 부담을 복음의 자리로 바꾸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에 큰 명절이 있었습니다. 그리운 고향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도 뵙고 친척도 뵙고 형제도 뵙습니다. 저는 이제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형제들도 다 떨어져 있으니,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을 돌아보든 지금을 돌아보든, 이렇게 만나서 한두 시간은 정말 좋습니다. 반갑습니다. 몇 개월 만에, 몇 년 만에, 어느 경우에는 몇십 년 만에 만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조금 있으면 서로 이 말 저 말 하는데, 대부분 다 자기 자랑입니다. 나 이랬다 저랬다 합니다. 친척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나 나이 드신 분들은, 너 안됐냐 뭐 안됐냐 하면서 자녀들의 사정이나 친척들의 상황을 대부분 아십니다. 그런데 나오는 말이, 야 너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있지 하는 식입니다. 내가 기도해 줄게, 힘을 얻어라, 이런 말은 잘 안 나옵니다. 이 속에 그것이 없으니 나오는 말이, 아 그래서 어땠냐,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 돈은 제대로 벌었냐 하다가,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실 불평이 아닙니다. 그 말은 대부분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사실을 말하는데, 그 말 속에 불평이 숨겨져 있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북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쌓이고 쌓입니다. 불과 한 시간 전에는 몇 개월 동안 기다리던 부모님과 형제와 친척인데, 한 시간만 지나면 이 속에서 섭섭함과 짜증과 분노가 올라와, 빨리 가야겠다 하고 그냥 가 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장 친한 가족 공동체와 친척 공동체가 한순간에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저도 예전 기억을 가만히 돌아보았습니다. 명절 때 꼭 신문에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안 좋은 일이 자꾸 벌어집니다. 칼부림이 났다든지,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났다든지, 폭력이 가장 많이 났다든지 합니다. 사실 폭력이 가장 많이 나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평상시에는 안 모이니까요.

 

그래서 성령강림 후 열여덟째 주일을 맞이하여, 이제 명절이 시작되기 전이 아니라 다 끝난 지금, 이때 내 마음을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 그리고 다음 설날이 되면 어떤 마음 자세를 미리 가지고 가야 하느냐, 이런 측면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오해하실 수 있는데, 왜 매번 질문하는 형태로 하느냐 하면, 첫째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질문 형식으로 하지 않으면,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면서 잔소리를 하게 되고, 잔소리를 하면 꾸중이 나오고 질책이 나와, 듣는 분이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보호하고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해,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태로, 어쩌면 저 자신을 임상 사례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 몇십 년 습관이 있으니, 그 질문에 답하다가 또 뭔가 거북한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셔서 여러분 자신을 보호하시고, 또 이 목사를 위해 기도하시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지난주 설교 주제가, 인정받으려는 욕구에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명절이 되면, 아주 예전 추석과 설날에는 제가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리더 되는 분이 계셨는데, 꼭 그때 일을 시키든지 못 가게 했습니다. 가면 제사를 지내니까요. 삼사십 년 전, 팔십 년대에는 더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되냐면, 그것이 습관이 되고, 또 이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오더라도 오지 못하게 하니, 저는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집회에 갑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서 제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 무려 사 년째 갑니다. 예전에는 제 자신이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너무 강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기준에 우리 교회가 어느 정도 규모가 되었다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았을 텐데, 그만한 수준이 되지 않으니, 큰 교회에 가서, 야 나도 목사인데, 그래도 뭔가 말씀을 깨달았는데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막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 조금 지나면 무엇을 말하냐면, 내 자랑입니다. 그것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왔습니다. 일 년째, 이 년째, 삼 년째가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도 예수는 그리스도 훈련을 하다 보니, 그것이 자꾸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인정받으려는 그 욕구가 나를 완전히 망가뜨린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계속 싸웠습니다.

 

이번에 가니, 제가 너무도 달라진 것이 보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새롭게 되는 것처럼, 야 내가 정말 많이 변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의도적으로 가려고 하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누가 나를 칭찬해 주지 않나 하며 돌아다니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 교회 지하에 커피숍이 있어 가면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데, 예전 같으면 갔을 텐데 안 갔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가면 그 마음이 살아날 줄 아니까 억지로 안 갔습니다.

 

그런데 한 분에게는 제가 속았습니다. 어떤 안수집사님이 계신데, 아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며, 오랜만에 뵈니 반가워서 오셨습니다. 저도 아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는데, 제 속에 벌써 차별하는 마음이 딱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니 저분은 안수집사님이지 장로님도 아니잖아, 내가 그냥 무시해도 되겠다는 마음이, 한순간에 확 솟은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솟아났습니다. 그분은 눈치채셨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나중에 느꼈습니다. 아 내가 저분을 차별하는구나. 그래서 아 이것도 꼭 정신 안 차리고 긴장 안 했을 때 탁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때도 언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이틀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는데, 계속 이번 주 말씀처럼 인정받으려는 그 속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식인이시니 생각이라 말씀드리지만, 그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영이 있습니다. 그 영이 살아서 이미 이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창세기 3장 때부터 들어와 이것이 활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불렀습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분보다 더 예민하게 알고 있어 부끄럽지만, 또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영적 존재의 속삭임을 끝까지 따라가면, 내 행동까지 장악될 것이 뻔하니까요. 제가 그것을 너무 예민하게 알고 있으니, 할 수 없이 나를 지키기 위해 부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과 15절을 이번 주에 얼마나 더 깊이 알게 되었는가.

 

저는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서, 바깥에 있던 사단을 봅니다. 사단은 자기가 신이고,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하나님과 사람을 갈라놓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이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입니다. 바깥에 있던 쓰레기가 다 이 안에 들어와서, 그냥 썩어 가는 것이 아니라 썩어서 계속 활동합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의 문제입니다. 살아서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것을 쭉 추적해 보면 딱 하나입니다. 내가 신이다, 네가 신이다.

 

제가 요즘 유튜브를 보는데, 이른바 국뽕 관련 영상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근거 있는 것을 봅니다. 자주 보는 채널이 하나 있는데, 논리적입니다. 거기 보면 외국 학자들이 한국 사람을 볼 때, 한국인들은 각자가 모시고 있는 신이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강하고, 너무 왕성하고, 너무 활기차다고 합니다. 다 자기가 신이라, 다들 잘났다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아 나는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의 자기가 신인 것이 가장 왕성한 대한민국에 태어나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요즘에는 금년이 지나면 대한민국이 국민소득 사만 불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인구 오천만에 사만 불인 나라는 전 세계를 따져도 몇 나라 안 됩니다. 대부분 인구 적은 도시국가들이 칠만 불, 팔만 불이지, 오천만 인구에 사만 불이면 대단한 나라입니다. 그것도 북한과 합치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 자기가 신이라는 것이 더더욱 왕성하게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특히 이번 추석을 맞아 다 각자 모입니다. 모여서 다 무엇이냐면, 다 잘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님도 중심이 아니고 내가 중심입니다. 부모님 편에서는 자녀지만, 그 자녀가 다 왕성하게 살아 다 신입니다. 신의 가족인데 체력도 있으니 다 나옵니다. 그러니 가장 안에서 수많은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자기가 신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끌고 가면 계속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킵니다. 더 분리시키는 것이, 가정 안에서 배우자를 분리시키고, 자녀를 분리시키고, 자기와 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자기 속에서도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정신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겪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내 속에서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열등하다, 너는 죄지은 인간이다. 그것을 수십 년, 육십 년 동안 장악당하니, 내가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의 인간인 것을 아시고, 창세기 3장 15절에서 내 안에 있는 신을 이기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다 망하는 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항상 길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붙잡는 사람은 응답받게 되고,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셔서 세상을 볼 때 정상적인 눈이 열리게 되고, 과거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냉정한 눈이 열리게 되고, 세상을 다스릴 모든 권세가 회복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이름을 얼마나 불렀느냐에 따라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다를 뿐이고,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느냐 안 부르느냐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창세기 3장 15절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고, 저는 항상 그것을 배경으로 구약 전체와 신약 전체를 봅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2장을 창세기 3장 15절의 개념으로 간단히 설명함.

 

창세기 3장 15절은,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불러야 합니까. 부를 필요성을 아는 만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주문처럼 외워도 되고 계속 불러도 됩니다.

 

어제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가 예전에 포항에서 교회를 개척했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곳에 양학동이 있고, 황해사라는 아주 큰 절이 있고, 옥천사도 있습니다. 그 황해사가 교회로 치면 방언으로 엄청나게 기도하는 곳 같은 절인데, 양학동 초등학교 바로 위에 있었습니다. 제가 새벽에 가끔 거기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것만 외칩니다. 앞을 보면 으리으리한데, 하는 것은 관세음보살,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하는데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또 구인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충청북도 어디에 있는데, 그 황해사의 본산입니다. 가 보면 상상도 못 합니다. 쭉 올라가면 계속 절이 있고 또 있습니다. 끝까지 올라가 보았는데, 목사님들과 함께 갔습니다. 거기 가면 수많은 사람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들어가 숙식하며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부르는데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같은 맥락으로 연결하면 참 애매하지만,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 그 이름 하나 불러서 되겠냐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 속지 마십시오. 야 너 그거 주문이잖아, 목사가 무슨 주문같이 부르냐 하는 속삭임이 옵니다. 그래요, 주문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단계를 지나면 괜찮으니 부르십시오.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서, 구약 성경은 창세기 3장 15절을 배경으로 쭉 올라오는 가운데 항상 외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다. 오셔야 네 안에 있는 나 중심의 신에서 벗어나고, 사단에게 매인 것이 풀어지고, 삶에서 온갖 우환과 질고를 가져다주는 영에 붙잡혀 살 수밖에 없던 것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그 이름을 붙잡고 오다가, 결국 신약 성경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복음에 그분이 오셨습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라는 분이고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그분이 다 이루셨기에 드디어 보내신 것이 구약에도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다 거하시고, 여러분과 저도 요한복음 1장 12절의 그 이름을 믿어 지금 이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그 성령이 삼천 명, 사천 명, 오천 명의 제자에게 임하시고 드디어 활동하십니다. 그 활동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갑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일이고,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러면 각 교회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응답받는가를 기록한 것이 로마서부터 이어지는 나머지 서신서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유럽으로 넘어와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때가 대략 주후 50년에서 52년 사이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일 년 반 이상을 가르쳤습니다. 가르쳤다는 것은 이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과 저처럼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라는 이 기본적인 언약이 마음에 심기도록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문제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하면서 세 파가 계속 싸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입니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2장을 보고 있습니다. 12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야 너희들 싸우는데, 지금부터 시각을 열어라. 어떤 시각이냐. 교회가 한 몸이다. 몸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보면, 손이 잘났다 하고 발이 잘났다 하고 눈이 잘났다 하며 서로 싸우면 소용이 없지 않느냐. 몸 전체로 보면 다 중요한 부분이 아니냐. 그러니 내가 잘났다는 데서 눈을 열어, 이제부터 교회 전체 공동체를 향한 시각으로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교회 공동체에서 어떤 부분에 필요하고, 저분도 어떤 부분에 필요하니, 마음의 시각을 교회 공동체의 시각으로 바꾸라고 바울이 조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눈이 열리도록 성령이 지혜를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간단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오늘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부분.

 

고린도 교회는 주후 55년경 이 편지를 받을 때 이미 기본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보다 더 대단한 기본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본을 갖추었다는 것은 지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그냥 이것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삶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쭉 가다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잘 흘러가는데도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기반 위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수많은 문제 중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왜 일어나느냐면 이렇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제가 가 보았다고 했습니다. 거기는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지역이고, 두 개의 바다를 낀 곳입니다. 그때 당시 전 세계를 다스리던 나라가 로마인데, 로마가 다스리던 나라 중 가장 큰 도시가 첫째 로마, 둘째 알렉산드리아, 셋째 안디옥, 넷째가 고린도였습니다. 인구가 사십만 명, 곧 대도시였습니다. 지중해에 있는 사람들이 다 거기 모여 장사하고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또 거기에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산 위에 대표적인 신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저번에 말할 때는 여사제들과 성적인 관계를 맺어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말했는데, 제우스 신전도 있었습니다. 큰 신전들이 그 도시를 다 장악하고 있었고, 거기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겠습니까.

 

그런데 바깥에서 사람들과 모여 장사하다 보면, 사람들은 다 끼리끼리 모입니다. 돈 많은 사람, 별로 없는 사람, 상류층, 하층민, 지도자들, 그리고 노예도 있습니다. 노예 중에도 지금 노예 신분인 사람이 있고, 노예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다 끼리끼리 모여, 상류층은 상류층끼리만 상대하니, 그때는 차별에 대해 별로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심각한 데가 어디냐면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이냐면, 유대인들, 헬라인들, 로마인들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아셔야 할 가이오나 이런 사람은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이고 돈도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하층민이 대부분이고, 아직 풀려나지 않은 노예들도 있습니다. 다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깥에서는 상류층끼리 모이니 하층민이나 노예를 별로 안 봅니다. 그때는 이 속에 편견과 차별과 나는 특권층이라는 것이 그렇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오니 매일 보는 것이 다 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 형제라고 하니, 이 속에 숨겨져 있거나 잠재되어 있던 차별하는 영이 폭발합니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고 나는 돈 있는 사람인데 왜 저 노예와 같이 있냐, 저게 왜 저기 있냐, 저들은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도 안 하시고 벌받은 존재 아니냐 하는 것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냐면 편을 모읍니다. 나는 바울을 인정한다, 나는 아볼로를 인정한다, 나는 베드로를 인정한다 하며 그쪽으로 몰립니다.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밑바탕에는 차별하는 영, 잠재되어 있던 그 영이 살아나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온갖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옛날에 왜 교회가 싸우나 했는데,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답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네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차별하는 영, 편견에 장악된 영이다. 이제부터 너 중심의 신을 대체해야 한다. 무엇으로 대체하느냐면, 교회 공동체의 영으로 대체하라는 것입니다. 이 속의 차별하는 영을 쭉 거슬러 올라가면 무엇이 있냐면 나 중심입니다. 내가 신인 것입니다. 나의 이익만을 위해 다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추석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한 시간 전에는 그립던 우리 아버지, 우리 형제였는데, 딱 십 분만 지나면 이상한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옛날로 돌아가, 너 왜 그랬냐 하며 반말이 시작되고, 벌써 속에서 차별이 생기고 짜증이 납니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에, 내 형제, 부모님이 똑같은 몸의 한 부분인데, 눈이 돌아가 원수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네 중심의 신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있는 성령으로, 전도자로 세우신 그 성령으로 네 마음을 바꾸고, 그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우선 함께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내안에교회도 이 기본 위에서 쭉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까 고린도 교회에 분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교회가 다 망가졌다든지 거기는 하나님의 자리가 아니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쭉 흘러가다가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또 그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느냐입니다.

 

여러분도 이번 주에 가족도 친척도 많이 만나셨을 것입니다. 아까 제가 첫 번째로 말씀드렸듯이, 저도 다른 교회에 갔는데 제 속에서 벌써 특권의식이 튀어나왔습니다. 목사니까, 아니 왜 저런 분이 저래,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계속 깨고 있으니까요. 은근히 있는 것을 제가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모르십니다. 저는 은근히 살아 있는 것을 나중에 감지하니까요. 그래서 아 이게 순간에 딱 튀어나왔네 하고 빨리 결박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가서 이틀 동안, 그 마음이 살아날 자리는 억지로 피해 커피집에 혼자 가만히 있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다른 쪽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은 무엇이 바뀌어야 하냐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내 이익만을 위해서, 내가 기분 좋으면 다 오케이, 내가 기분 나쁘면 다 노, 이것이 다 나를 죽이고 사람을 죽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도 한순간에 죽여 버립니다. 가장 사랑해서 함께 온갖 생사고락을 겪은 사람인데, 한순간에 원수가 되어 던져 버립니다. 왜 그러느냐면, 이 속 가장 밑바탕에 있는 내 신이 순간순간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이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을 갱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냐면, 내 안의 나 중심의 신이 아니라 전도자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입니다. 성령은 나를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성령은 나를 가정 전체에서 복음을 맡은 전도자로 세우셨고, 어떤 단체나 조직에 들어가면 그 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론은 쉽습니다. 아 그래 바꾸면 되겠지, 하지만 아닙니다. 내가 신인데 어떻게 바뀝니까. 저도 안 바뀝니다.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로 해야 합니다.

 

저를 따라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그래서 내 속에서 끊임없이 사람을 분리시키려 하고, 끊임없이 나만 절대화하려 하고, 끊임없이 남을 깔보려 하는 그 영, 주체하지 못하는 그 영을 예수는 그리스도로 계속 밀어내야 합니다. 그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이, 아 이 공동체 전체를 위해 기도해야겠다, 내가 사는 지역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열립니다. 내가 어떤 가정에 갔다 왔든 어떤 단체에 갔다 왔든, 그 전체를 놓고 기도하는 전도자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야가 넓어지면서 점점 글로벌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끊임없이 그 이름을 불러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하나 나누겠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군목으로 갔으니 할 수 없이 사천오백 명을 관리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연대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연대의 지피에 있는 사람들까지 관리해야 했습니다. 최전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참 이상합니다. 이 속에 사천오백 명이 들어옵니다. 사천 명, 오천 명이 들어옵니다.

 

제가 예전에 대통령을 볼 때, 그분에게는 대한민국 오천만이 들어와 있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어떤 분은 오천만이 들어와 있고, 군대의 사단장은 만이천 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는 사천 명이 들어와 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여기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 부대는 저렇게 됐으니 저기는 어떻겠다, 이것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난 다음에 보니, 나 혼자, 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나 한 사람뿐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한 몸이지 않느냐, 교회 전체를 마음에 품는 전도자가 되라고 합니다. 네 혼자라는 신을 넘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서 끊임없이 살아나려면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것이 자꾸 밀려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기 전에 마음의 정리부터 해야 하고, 계속 정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전체를 위해 기도하시고, 여러분의 가정 전체를 위해 기도하시고, 어떤 단체에 가면 그 단체 전체를 위해 전도자로 보냄받아 기도하시고, 신문을 볼 때는 글로벌 전체를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눈으로 바뀌는 것은,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이 부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그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이루어져, 성령이 그 부분에 눈을 열어 함께하시는 것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힘입어, 나 중심의 신에서 점차 벗어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성령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나 중심의 신에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 가정을 위해, 친척을 위해 기도하는 전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 모든 집단과 단체를 내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하시고, 또 드러나는 문제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게 하셔서, 하나님이 온전히 바꾸시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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