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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교회 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스물세째 주일. 2026.11.01.성령은 닫힌 사람의 마음도 여십니다

주일말씀 성령강림 후 스물세째 주일

제목 성령은 닫힌 사람의 마음도 여십니다

본문 사도행전 16장 1절부터 14절

핵심 말씀 사도행전 16장 14절

저는 오늘 성령강림 후 스물세째 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은 닫힌 사람의 마음도 여신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성령에 대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큰 흐름으로 보면, 바깥에 나가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것이냐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흩어진 자리에서도 교회가 중요하고, 우리가 개인 교회로서 움직인다는 것, 곧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니 그 개인 교회가 움직인다는 측면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개인 교회가 움직이다 보면 수많은 사람과 환경을 만납니다. 특별히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꽉 막힌 사람, 고집 센 사람, 절대로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의 마음은 성령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마음도 여시는 것입니까. 오늘은 이런 측면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다섯 가지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첫 번째. 이번 주에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하였는가.

이것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면서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주에도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우리 한번 고백해 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나는 하나님의 자녀. 모든 문제 끝. 마귀야 물러가라. 성령 충만. 세계 복음화.

저는 이것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숨 쉴 때마다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삼사 년 동안 한 단체에서 훈련받은 것이 습관이 되어, 그것을 지금까지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지식이 중요한 시대라, 무엇을 안다고 하면 그것으로 다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들어오는 것은 무엇을 알기 시작하는 첫 단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영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 지식 다 알았으면 다 끝난 거야. 다 아는 거야. 이렇게 착각하도록 만듭니다.

저도 그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많은 정보를 들으면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고, 특히 목사이니 성경도 잘 안다고 여겨, 그 속에서 나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정보를 많이 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면에서 훈련으로 자리 잡으려면 매일매일 반복해야 합니다.

**반복 훈련할 때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면,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해야 하니, 그 지루함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 지루함을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서 이겨 내야 합니다. **지루하면 또 올라오는 영이 있습니다. 야 너 안 해도 돼. 지루하잖아. 이걸 반복하다니 너 미친 거 아니야. 너 기계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고 생각 있는 존재잖아. 그만해. 이렇게 또 옵니다. 그 단계에서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훈련이라는 것을 아니,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저를 따라 해 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이것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목회자 수련회를 갔습니다. 수련회에 가면 회비가 있는데, 넉넉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내안에교회는 늘 그 회비에 적은 금액이라도 더 채워 보내 주어서, 제가 조금 마음이 섭니다. 형편이 어려운 분들도 있는데, 저희는 조금이라도 보태니 그렇습니다.

목사님들이 한 스무 명, 일이 년에 한 번 모여 이박 삼일을 함께 지냅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사건이 생기면 불평하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또 힘을 합하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꼭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누가 태클을 걸면 제 속에서 짜증이 팍 올라왔습니다. **이미 뜻이 정해진 쪽으로 가야 하는데 왜 거기서 자기 의견을 내놓느냐 하면서, 속에서 저 사람 도대체 왜 저러나 하고 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진짜 많이 받아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많이 가라앉더라고요. 또 달라진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내가 못 바꾸는데, 내가 말한다고 저 사람이 바뀝니까. 그것은 또 내 생각이고 내 감정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생겨 그 사람의 인격까지 모독하며 저게 사람이냐 하고, 실제로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그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그 생각이 깨어지도록 계속 기도했습니다.

또 한편, 이번 수련회에서 제가 주로 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들고 다녔습니다. 녹음기를 켜고 다녔습니다. 무엇을 했느냐면, 다 아는 목사님들이니 사실 더 대화할 것도 없습니다. 보면 뭐 잘 지냈느냐, 교회는 어떠냐, 다 아는 것이니 별로 대화를 안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기 전부터 기도했습니다. 저 목사님에게 이번에 어떤 것을 인터뷰할까, 저 목사님은 또 어떤 것을 인터뷰할까.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똑같은 분이고 매번 만나는 분인데, 물어볼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지금까지의 신앙 여정이 다 다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것뿐이고, 그 속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과는 이틀 동안 인터뷰를 했는데, 무려 여섯 시간 반을 했습니다. 둘째 날 밤 여덟 시부터 새벽 한 시 반까지, 그분하고만 했습니다.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하느냐, 당신의 여정에서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하느냐, 그 싸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런 생각이 올 때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렇게 쭉 내려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태까지 이렇게 깊이 이야기해 본 적도 없고, 자기 속 내면에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들여다본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분도 각자 인생의 여정은 다르지만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하고 있구나,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속 들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목사님은 또 인터뷰를 하냐고 했습니다. 지겹도록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막상 인터뷰를 해 보니 눈이 열려서, 아 저분은 저것을 가지고 저분은 저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번에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이 또 있습니다. 아 다음에는 또 다른 주제가 이야기되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느냐면, 제 마음속에서 그 상황에서도 계속 영적 싸움을 하니, 그분이 어제 저에게 섭섭하게 한 것이 기억이 안 납니다. 그분이 전에 이 단체에서 자기 의견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인 것도, 순간이 지나면 잊어버려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내 마음을 지키니 그렇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내가 순간순간 대화를 나눈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그 사람과의 사이를 갈라지게 만드는 그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다시 고백합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번 주에 다 이겼느냐 하면 아닙니다. **다 이긴 것이 아니라, 졌다 하더라도 바로 다시 설 수 있고, 졌다 하더라도 회복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자꾸자꾸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참 부끄럽게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처형에게 빌린 돈이 있습니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제가 빌린 것이 아니라 사모님이 빌린 것인데, 저 때문에 빌린 것입니다. 그래서 몇십 년이 되도록 별로 갚지 못했습니다. 제 속에서 미루고 있는 것을 제 자신이 분명히 인정합니다. 돈이 생길 때마다 늘 후순위로, 조금씩만 갚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 어떤 일을 계기로 그 일이 딱 불거졌습니다.

사모님이 왜 정한 날에 안 갚느냐 하면서 저에게 이야기하는데, 속에서 무언가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올라오더라고요. 그전에도 올라왔었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표시가 확 났습니다. 그래서 바로 무슨 말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 올라오는데 제가 알았습니다. 아, 지금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딱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 안 나왔습니다. 말이 나오면 분명히 무언가 튀어나올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제가 제 속에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화가 요만큼밖에 안 나오는 것입니다. 튀어나가려고 하는데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 붙잡고 있으니, 마음 가장 밑바탕에서 평안함이 받쳐 주는 가운데 조금 올라오다가 말더라고요. 제가 저를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인상은 조금 찌그러졌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사모님을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으니, 느낌으로는 아셨을 것입니다. 아 조금 화가 났겠구나 정도는. 그러나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는 잘 모르셨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아니, 아 내가 잘 지키고 있구나 하고 신기해했습니다.

그것이 이번 주에 제가 가장 놀란 일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튀어나와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그다음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사람은 늘 자신의 리얼한 모습, 찌질한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 서서 제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부르니 저 목사님은 이제 다 된 것 같다고 여러분이 보시겠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제 속에서는 더 예민하게 느끼니 더 치열하게, 더 리얼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피곤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합니다. 이것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피곤하게 사는 제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데 자꾸 이것이 벗겨지니 자유로운 저를 봅니다. 속에 은근히, 은밀히 있던 것이 어느 때 팍 튀어나오면, 그것을 다시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하고 해결하니,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칭찬 같은 이야기지만, 엊그제 사모님에게 끌려 피부 관리실에 가서 주사를 많이 맞았는데, 상담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가 저 정도인데 왜 이렇게 두 분 다 얼굴이 평안하시냐고요. 그것은 얼굴 형태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눈이 평안하고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내가 조금 증인으로 되어 가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두 번째. 이번 주에 창세기 3장 15절을 얼마나 깊이 알게 되었는가.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최초의 조상이 그 문제를 가진 채 쭉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깥에 있던 사단, 바깥에 있던 어둠, 바깥에 있던 공허함, 바깥에 있던,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 신적인 마음이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육체 안에 들어오고 생각 안에 들어오고 유전자 안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행했는가와 상관없이, 나는 태어나면서 이미 죄와 사망에 잡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고, 자연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외에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은 계속 내가 신이 되려는 것이니, 나도 신이 되고 다른 사람도 신이 되어 충돌만 일어나고 갈등만 생깁니다. 그로 인해 귀신은 더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이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그것이 왜 나오느냐면, 창세기 3장 1절부터 5절에 그 근원이 나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심판받을 수밖에 없고, 그 영원한 심판이 또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져 역사가 흘러가는 것이 인간의 파노라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조금 지은 것을 해결하려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송두리째 바꾸실 수 있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저를 따라 살아 보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 예수라는 이름은 아직 아니지만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이름이고, 그래서 구약 성경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고 부르는 사람에게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저도 가만히 적용해 보니, 아는 것은 그냥 기초입니다. 이제 한 단계 넘어간 것뿐입니다. 그 이름을 자꾸 부르고 부르니 무엇이 됩니까. 눈이 조금씩 열립니다. 이전에 성경에 대해 수없이 알고 있던 것이 이제 조금씩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후로 쭉 나아간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 이름을 부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저도 이번 주에 그것을 더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창세기 3장 15절을 배경으로 오늘 본문 사도행전 16장을 해석하라.

성경은, 인간이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3장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신이 되어 사단이 안으로 들어오니 그다음부터 사단의 자녀가 되어 쭉 흘러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지으신 분이기에, 그 인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계속,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면 된다고 하는데, 그 그리스도가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예수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시고, 사십 일 동안 계시다가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셔서 보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이십니다. 저를 따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 성령 충만.

지금 시대는 성령 시대입니다. 복음서에서 육체로 계셨던 그리스도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부터는 이 성령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쭉 퍼져 갑니다. 6장과 7장과 8장을 보면, 복음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가 사마리아로, 나중에 안디옥으로 퍼져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인데, 오늘 본문 16장에는 누가 나옵니까. 바로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때 당시로 따지면 주후 49년에서 50년 무렵입니다.**

바울이 어디로 갔느냐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럽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도행전 16장입니다.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그때 빌립보라는 지역에 가서 찾고 찾고 찾다가 누구를 찾느냐면 루디아라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거기서 세워진 교회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네 번째. 오늘 말씀에서 중점적으로 해석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인가.

저는 이것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도행전은 로마서부터 요한계시록 전까지의 서신서와 성격이 좀 다릅니다. 사도행전은 역사서라, 복음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해졌는가를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중심에 놓고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다음 로마서부터 요한계시록 전까지는, 그렇게 확산된 가운데 개 교회들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기록한 것이 서신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설명드리고 싶은 것은 바울이라는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바울이 지금 누구를 만났느냐면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루디아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거쳐 온 과정이 너무 복잡합니다. **성경에 자세히 나옵니다.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고,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셔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가고, 거기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뒤 사모드라게를 거쳐 네아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루디아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지역을 거쳐 온 것입니다. 시간으로는 며칠이지만, 그 며칠 동안 수많은 도시를 거쳐 왔습니다.

그리고 희한한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빌립보 지역에 왔는데, 그 지역에서도 루디아를 만나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때 빌립보에 살던 사람은 약 만 명 정도였고, 시기로는 주후 49년에서 50년입니다.** 바울은 보통 어떤 식으로 전도했느냐면, 자기가 유대인이니 먼저 유대인 지역을 가고, 가장 먼저 가는 곳이 회당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당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 지역은 대부분 로마에서 온 퇴역 군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고, 노예도 상당수였습니다.** 자기 동족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도처도 없었습니다. 또 바울은 보통 남성들 위주로 전도했는데, 거기에는 남성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조건 자체가 다 막혀 있는 것입니다.

**수학으로 따지면 조건 조건 조건이 다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빌립보 숙소에 와서 며칠 동안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데, 빌립보까지 왔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회당도 없고, 기도처도 없고, 남자들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문 밖으로 나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고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람이 많으면 회당을 짓지만, 한두 사람밖에 없으면 안식일에 강가로 나가 몸을 씻고 정결 예식을 하며 기도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두 사람이라도 있을까 하여 강가 기도처로 나갔는데, 거기에 소수의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데 듣기는 듣지만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방 여인 하나, 바로 그 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 한 사람에게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자, 제가 대충 설명드렸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의 마음입니다. **바울의 속에는 계속 안 좋은 조건들이 밀려들었습니다.** 빌립보에 오기까지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드로아, 사모드라게, 네아볼리를 거쳐 왔습니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그렇게 막히는 조건이 속으로 밀려올 때 영이 올라옵니다. **야 여기도 막히니 너 전도할 데 없어. 돌아가. 더 이상 전도할 데 없어. 이렇게 옵니다.** 만약 바울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아 이제 전도할 데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쫙 밀려왔을 것입니다.

빌립보에 딱 왔는데 며칠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아무리 뒤져 봐도 유대인이 없습니다. 그러면 또 속에서 밀려옵니다. **야 여기는 전도할 데 없어. 유대인도 없고 회당도 없고 남자들도 없어. 여자 몇에 유대인 소수뿐이야. 여기에는 네 말을 듣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사람 하나도 없어.** 이렇게 밀려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수없이 안 되는 조건에서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만약 바울이 자기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루디아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안 되는 조건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면, 정작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셔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더라도 그 얼굴은 시큰둥했을 것입니다. 근심 걱정과 불안과 좌절과 우울이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루디아의 마음이 열렸겠습니까. **성경에서 항상 중요한 것은 증인입니다.** 바울은 수없이 안 되는 조건 속에서도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자기 마음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바깥 현장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은 다 안 되는 조건인데, 결국 안 되는 조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안으로 들어와 자기 마음을 휘어잡는 그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이겼다든지, 힘써 전도해서 됐다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예수는 그리스도로 계속 지키니, 평안함 가운데서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 한번 해 봅시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다섯 번째. 오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제 간증을 해 보겠습니다. 저는 제일 처음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를 때, 그 첫 단계가 제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수십 년 동안의 죄책감과 열등감,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죄책감의 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열등감의 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면 너는 죄인이잖아, 너는 안 되잖아 하는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있었고, 다른 목사를 보면 야 너는 저기는 안 되잖아 하는 열등감이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찌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는 그리스도로 밀어냈습니다. 그 영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꾸 밀어내니, 그 거대하던 것이 자꾸 축소되더니 어느 순간 조그마해졌습니다. **지금은 죄책감이 거의 들지 않습니다. 마치 마약에 완전히 중독됐던 사람이 마약을 보더라도 안 먹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드는 것처럼, 그런 상태가 됐습니다.** 교회를 보더라도, 다른 목사님을 보더라도, 무언가 죄책감이 들 만한 것을 보더라도 마음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제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가진 그 문제가 해결되니, 그다음에는 바깥에서 오던 것,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배우자와 자녀와의 대화 속에서, 예전에는 문제가 안 되던 것이 문제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습니다. 그 사람의 말로 인해 내가 영향을 받아 그 사람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말을 안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참는 것은 잘하고, 상담을 배웠으니 말로 표현을 안 합니다. 누가 싫은 말을 하거나 자녀가 싫은 말을 하면 아 그래, 하면서도 속에서는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있구나 하며 기분 나쁜 것이 일부라도 있었습니다.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하다 보니, 그것도 내 마음을 지켜야겠다 하니 영적 싸움이 되더라고요. **더 중요한 것은, 목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전도자라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바깥에 나가 뭔가 막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사실 안 됐습니다. 수십 년 동안 했는데 안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깥에서 오는 안 되는 상황도 내가 예수는 그리스도를 불러 내 마음을 지켜야겠다 하고 바꾸었습니다. **저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저 사람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바꿔야겠다 하고 계속 지켰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상황이 와도 자꾸자꾸 내 마음을 지키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 이거 참 신기하다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계속 예수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니, 오랫동안 안에 있던 것과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겠지만, 그 단계가 조금씩 지나갑니다. 그런데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또 영향을 받습니다. 배우자가 한마디 하면 기분 나쁘고, 자녀가 한마디 하면 속에서 무언가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녀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자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 문제가 아닙니다. 내 문제입니다.** 그 행동을 통해 그 영이 나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야 쟤는 저러는데 네가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

**나도 나를 못 바꾸는데 어떻게 사람을 바꿉니까. 나도 못 바꾸는데 어떻게 세상 환경을 바꿉니까. 잔소리하면 바뀌겠지 하는 것, 그것이 귀신의 말입니다. 내가 한마디 하면 저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는 그다음부터 사람 바꾸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나도 못 바꾸는데 왜 사람을 바꾸려 합니까. 다만 그 사람의 말로 인해 내가 영향을 받아 그 사람을 비판하고 나를 이상하게 만들며 충동질하는 그것은, 내가 바꿔야겠다 하고 내 마음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들어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에게는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바꾸고, 적극적으로 뒤집어엎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는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는 것, 그것도 귀신의 소리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바깥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내 자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를 지키십시오. **저기 두 살짜리도 나는 못 바꿉니다. 조금 말해서 예 하게 할 수는 있지만, 벌써 초등학생도 못 바꿉니다. 나를 바꾸고 나를 지키십시오. 그러면 평안함이 드러나는 가운데 영향력은 줄 수 있습니다.**

마무리 기도

말씀 붙잡고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의 환경이 아무리 최악이라 할지라도, 풀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의 가정과 배우자와 자녀가 변화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수없이 노력하지만 그것 자체가 나의 고집스러운 신념이고 사단의 말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깥 상황이 최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 마음에 들어와 내 마음을 휘젓고 수많은 악한 행동으로 흐르게 할 것인데, 내 안에서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인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 이기고 승리하며 증인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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